스테로이드로 버티던 아동들, 희귀 신장병 'K지침' 나왔다

2025-08-27

네살 A군은 최근 감기 증세가 있어 집 근처 병원을 찾았다. 나흘이 지난 뒤 감기 기운은 사라졌지만, 대신 온몸이 퉁퉁 붓는 부종이 발생했다. 결국 A군은 급히 서울대어린이병원에서 혈액·소변 검사 등을 받았다. 그렇게 나온 진단은 생각지도 못한 '소아청소년 신증후군'. 몸속 단백질이 소변으로 빠져나가는 단백뇨가 확인됐고, 혈액 내 알부민(단백질) 수치는 낮게 나오면서다.

희귀질환인 소아 신증후군은 A군처럼 왜 생기는지도 모른 채 갑자기 찾아오곤 한다. 국내 등록 환자 수는 약 2500~3000명으로 적지 않다. 이처럼 고통받는 어린 환자들을 빠르고 안전하게 치료하기 위한 '한국형 진료 권고안'이 처음으로 나왔다. '이건희 소아암·희귀질환 극복사업'이 뿌리고 의사들이 가꾼 씨앗이 3년 만에 싹을 틔운 셈이다.

소아 신증후군은 신장 기능 이상으로 단백질이 몸 밖으로 빠져나가면서 전신 부종 등이 나타나고 감염도 쉽게 일어나는 병이다. 주로 2~6세 시기 발병하고 대개 성인이 되면 괜찮아지는데, 정확한 원인은 알려져 있지 않다. 이들 중 90%가량은 스테로이드 치료가 가능한 스테로이드 반응성 환자, 나머지 10%는 그렇지 않은 불응성 환자로 분류된다.

스테로이드제나 면역조절제를 쓰면 대부분 증상 관리가 가능하지만, 어린 아동인 만큼 키 성장 지체 등 부작용이 적지 않다. 또한 환자 증세가 어떻게 나타날지 예측이 쉽지 않아 과잉 치료, 잦은 재발 등의 문제가 이어졌다.

환자 재발·부작용 등 문제…22년부터 연구 시동

사망 위험은 적지만 '삶의 질'을 크게 떨어뜨리는 병인 셈이다. 실제로 신장 질환 환자들이 모인 온라인 커뮤니티엔 "5살 때 신증후군 판정을 받았는데, 고교 2학년이 됐는데도 자주 재발한다. 곧 성인이 되는데 점점 겁이 난다"는 등의 하소연이 적지 않다.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대한소아신장학회 소속 의사들이 2022년부터 머리를 맞댔다. 환자를 찾기 어려운 희귀질환 특성상 수많은 연구 자료 등을 모으고 분석하는 데 '집단지성'이 활용된 것이다. 발병 초기부터 안전하고, 효과적인 치료를 하기 위해 체계적인 진료 가이드라인을 만들자는 목표가 깔렸다. 일부 의료진이 더 좋은 최신 치료법을 놓치는 경우도 있어 진료 현장에 통일적으로 적용할 지침이 필요하다는 점도 영향을 미쳤다.

이건희 기부금이 마중물…"없었으면 연구 못 했을 것"

개별 병원을 넘어 전국 단위로 이뤄진 연구엔 2021년 고(故) 이건희 전 회장 유족이 기부한 3000억원이 마중물 역할을 했다. 예전엔 각 연구자가 환자 사례를 '엑셀 파일'에 모으고 채우는 식으로 알음알음 이뤄진 분석이 훨씬 수월해진 것이다.

강희경 서울대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는 "성인 질환과 비교해 소아 희귀질환은 각종 연구비 지원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게 현실"이라면서 "이건희 기부금이 아니었다면 많은 병원·의사가 참여하는 사업을 시도조차 하기 어려웠다. 진료 환자 증상을 실시간으로 추적하고, 이들의 시료도 채취하면서 체계적 연구가 가능해졌다"고 말했다.

2년여간 노력한 결과, 지난달 대한소아신장학회 명의로 '소아청소년 스테로이드 반응성 신증후군의 근거 기반 진료권고안'이 발표됐다. 탄탄한 의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국내 환자에 특화된 치료법이 제시된 셈이다. 예를 들어 외국과 달리 데플라자코트·사이클로포스퍼마이드 같은 약제를 사용하는 쪽으로 권고하는 식이다.

강 교수는 "부작용이 덜한 데플라자코트는 유럽 등에선 비싸다고 별로 쓰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사용할 수 있다고 봤다"면서 "사이클로포스퍼마이드도 서양에선 거의 안 쓰지만, 비용 대비 효과성이 좋은 편"이라고 설명했다.

주요국보다 선도적 지침 개발…"통일된 진료 기대"

이렇게 개별 국가 차원의 진료 지침을 마련한 건 주요국과 비교해도 앞선 편이다. 한국보다 먼저 나온 가이드라인은 국제신장학회, 일본·인도 등으로 손에 꼽을 정도라고 한다.

이현경 중앙대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는 "우리나라 실정에 맞춘 권고안의 오랜 부재로 임상 의사들이 각자 방식으로 진료해왔다"면서 "새 권고안 개발로 보다 통일되고 국내 의료 환경에 적합한 진료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밝혔다.

덕분에 '더 나은 치료'를 위한 꿈도 키울 수 있게 됐다. 이번 가이드라인은 일종의 시작이다. 다음 달엔 권고안을 바탕으로 환자와 그 가족들에게 최신 치료·관리법을 공유하는 자리를 마련한다. 아직 만들지 못 한 스테로이드 불응성 소아 신증후군 환자를 위한 진료 권고안은 내년까지 만들 수 있을 전망이다. 장기적으론 환자 치료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바이오마커(몸 상태 변화를 확인하는 지표)도 구축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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