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의 짝꿍 단어는 ‘희생’ 아닌 ‘행복’입니다” [차 한잔 나누며]

2025-03-23

조지은 英 옥스퍼드대 한국언어학 교수

언어 습득·이중언어 등 전문가

강남 교육열 꼬집은 소설 펴내

“영어유치원 매달릴 필요 없어

압박감 탓 ‘울렁증’ 생길 수도

늦더라도 즐거운 마음 들어야

학생에 날개 달 교육 고민할 때”

“여전히 우리는 ‘교육’을 ‘희생’과 지나치게 연결지어 생각하곤 합니다. 아이도 부모도 학업을 위해 엄청난 희생과 노력을 하지만 많은 가정에서 교육 문제로 고통과 상처가 생기죠. 이제는 교육과 희생을 디커플링(탈동조화)할 때라고 생각해요. 교육의 짝꿍이 되어야 할 단어는 ‘행복’입니다.”

조지은(49) 옥스퍼드대 한국언어학 교수는 2001년 서울대 언어학과 석사학위를 마치고 영국 유학을 떠나 24년째 영국에 산다. 인생의 절반을 한국, 나머지 절반을 영국에서 보내며 언어 습득과 이중언어, 인공지능(AI) 언어학과 한류 등을 연구해온 그는 자신의 전문 분야인 영어 교육 관련 대중서를 여러 권 발간해 국내 독자와 만나왔다. 그런 그가 서울 강남의 가상 아파트 단지를 배경으로, 과도한 교육열과 허세를 풍자적으로 그려낸 장편소설 ‘서울 엄마들’을 이달 발표했다. 지난 21일 서울 용산구 세계일보 사옥에서 만난 조 교수는 “중요한 주제이지만 강의나 논픽션으로 심각하게 풀면 재미가 없는 이야기를 어떻게 많은 사람이 관심 갖도록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첫 소설을 썼다”고 말했다.

소설은 강남 내에서도 최고 수준의 엘리트 교육을 추구하는 이들이 모여 사는 ‘대지동 금묘아파트’가 배경이다. 경력단절여성 ‘선아’, 워킹맘 변호사 ‘진아’, 학벌 세탁한 돼지엄마 ‘미아’. 출신도 경제 사정도 다르지만 높은 교육열만은 같은 80년대 초반생 세 엄마와 그 가정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세 가정의 아이들은 금묘아파트 상가 내 산후조리원부터 영어유치원(영유), 학원으로 이어지는 ‘토털케어 시스템’을 통과하며 숨가쁘게 ‘관리’된다. 늘상 학업 스트레스에 눌려 있는 아이들도, 다른 집 아이들과의 비교에 얽매여 발을 동동 구르는 부모들도, 모두가 불행한 처지다.

조 교수는 이 책의 첫 번째 목표로 ‘재미’를 꼽았다. “제가 (한국 교육 상황에 대해) ‘이렇게 합시다, 해야 합니다’ 하는 목소리를 내는 건 맞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이곳이 아니라 영국에 있으니 그럴 위치가 아니고 자격도 없습니다. 다만 책의 ‘웃픈’ 이야기들을 읽으며 독자들이 감정을 해소하고, 한편으로 한 번쯤 ‘우리가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가’를 잠시 멈춰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소설에선 막 아이를 낳고 금묘조리원에 입소한 엄마들이 ‘브론즈-실버-골드-프리미엄 골드’ 단계로 나뉘는 금묘 영유에 보낼 준비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금묘아파트에선 이런 말이 상식으로 통한다. “생각이 있는 부모들이라면, 영어는 초등 입학 전에 떼줘야지요. 그래야 나머지 공부 선행을 하기가 쉬워요.”

언어 습득과 이중언어 전문가로서 조 교수는 ‘4세 고시’와 영유를 어떻게 볼까. 옥스퍼드 영어 사전 편찬위원인 그는 “아이가 (영유와) 맞을지 아닐지를 부모가 잘 판단하는 게 가장 중요하지만, 그곳에 간다고 아이의 영어 학습에 관한 모든 점이 해결된다거나 영어를 ‘마스터’할 수 있다는 건 잘못된 사실”이라며 “영어를 뗀다, 끝낸다, 선행(학습)한다는 표현 자체에 모순이 있다”고 단호히 말했다. 이어 “아이들의 (영어) 능력을 측정하는 것은 언어 능력이 아닌 단기 기억을 채점하는 것”이라며 “(영유 입학 레벨 테스트) 결과에 울고 웃을 필요가 없다”고 설명했다.

오히려 어린 아이들에게 몰입식 교육을 지나치게 강요할 때 오히려 사고력 확장이 차단되거나, 영어에 대한 압박이 생겨 말하고 싶은 마음을 잃고 입을 다물어버리는 부작용도 관찰된다고 한다. 한국인에게 유난히 자주 나타나는 ‘영어 울렁증’이다. “부모님들은 흔히 ‘애들은 애들이니까 (영어 사용 환경에서) 그저 부딪히게 두면 잘할 거야’라고 생각하십니다. 그러나 영어 울렁증 연구를 해보면 아이들이 더 많은 상처를 받아요. 한국에서는 어린 나이에 영어를 접하게 해야 한다는 시기의 문제에 굉장히 집착하지만, 중요한 건 시기가 좀 늦더라고 즐거운 마음으로 영어를 만나게 할 방법입니다.”

한류 연구 권위자이기도 한 조 교수는 “한류 덕분에 한국인이 한국인으로 사는 게 너무 자랑스러운 시대를 살고 있다는데, 교육 부분에서만큼은 여전히 어려운 상황”이라며 “영국 어린이들이 한국에 환상을 품고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을 만큼 한국이 문화적 리더가 됐다. 앞으로 한류의 좋은 모델을 이어가기 위해서라도 교육 문제를 다시 바라볼 기회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AI에 따른 지식 습득 패러다임 변화가 교육 현장에 미칠 충격파도 예견했다. “AI가 우리 삶에 너무 가까이 왔고, 교육자는 지식 전달이 아니라 학생들에게 방향을 잡아주고 그들이 끝까지 갈 수 있도록 북돋아주는 공감의 역할로 변화할 것입니다. 학생들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성숙한 교육 문화를 만들기 위해 지금부터 하나씩 바꿔 나가면 돼요. 모두가 잠시 멈추고 ‘죽도록 달리는 것만이 능사일까’를 질문하는 데서 시작할 수 있을 겁니다.”

이규희 기자 lkh@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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