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당신을 배신하겠습니다

2025-05-20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4월29일 미시간주에서 취임 100일을 기념하는 연설 행사를 열고, 미국의 심장부인 ‘하트랜드(Heartland)’에 대한 애정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미시간을 비롯한 중서부와 남부 일부 지역을 일컫는 하트랜드는 오랜 세월 제조업·농업·에너지산업의 중심지였으며, 블루칼라 노동자들의 터전으로 자리 잡았다. 트럼프는 이곳을 “워싱턴과 글로벌 엘리트가 외면한 진짜 미국의 심장”이라 부르며, 하트랜드를 경제와 사회의 근간으로 재조명해왔다. 그는 노동자들의 삶과 일자리를 지키는 일을 자신의 정치적 정체성으로 내세우며 이를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미국 하트랜드는 1980년대 이후 제조업이 붕괴하면서 일자리를 잃고 지역경제가 무너지는 산업 공동화의 상징으로 전락했다. 젊은이들은 일자리를 찾아 떠났고, 남겨진 지역은 빠르게 고령화됐으며, 도시 곳곳에는 빈집과 폐허가 늘어만 갔다. 경제적 몰락은 지역사회의 결속력마저 붕괴시켰고, 교육과 의료 같은 공공 인프라도 유지되지 못한 채 점점 더 깊은 사회적 고립과 붕괴의 악순환에 빠져들었다. 이런 절망의 한복판에서 마약과 알코올 중독, 자살이 급증하는 ‘절망사(deaths of despair)’ 현상이 본격화됐다. 트럼프는 바로 이 버림받은 심장부를 자신의 정치적 무대로 삼았고 무역장벽과 제조업 부활, 강경한 이민 정책이라는 해답을 들고 그들의 절망 속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트럼프의 정책을 지지하지 않는다. 보호무역과 이민 정책이 하트랜드를 되살릴 수 있다고는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설득력 있는 서사를 가진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절망의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자유무역이 더 낫다”는 말은 공허한 이론 놀음일 뿐이다.

윤석열은 5월11일 “이번 6·3 대통령 선거는 2030 청년세대가 살아갈 자랑스러운 자유 대한민국의 체제를 지키는 생사의 갈림길”이라고 선언했다. 이어 국민의힘은 30대 남성 김용태 의원을 전면에 내세워 청년층 공략에 나섰고, 17일에는 그의 탈당 요구를 윤석열이 수용하는 듯한 장면까지 연출했다. 트럼프가 틈만 나면 하트랜드를 소환하듯, 윤석열도 계엄 이후 줄곧 2030 청년세대를 정치적 구호처럼 입에 달고 산다. 그러나 윤석열, 김용태와 “윤석열이 아버지”인 김계리의 조합은 이상하게도 가슴을 울리지 않는다. 트럼프의 서사에는 하트랜드의 오래된 절망과 상처를 껴안으려는 공감이 있지만, 그들의 2030 청년세대 서사에는 그런 진정성이 없고 “계몽”만 있기 때문이다. 윤석열은 채 상병처럼 심기를 거스르면 20대 남성이라도 외면하고, 조민처럼 필요하면 20대 여성도 탈탈 털 수 있는 사람이다. 그가 부르는 청년의 이름이 공허하게 들릴 수밖에 없다.

“아버지, 당신을 배신하겠습니다.” 이 구호는 1990년대 초 서울대 총학생회 선거에서 학생운동권이 내세운 상징적인 문구다. 기성세대의 가치관과 결별하겠다는 청년세대의 결의를 가장 도발적인 방식으로 드러낸 표현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아버지’는 단지 가족을 넘어, 권위적이고 보수적인 기성세대를 상징한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그 시절 학생운동의 한편에는 가족 내 갈등, 특히 아버지의 권위에 대한 반발심이 자리 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가족이란 원래 그런 존재다. 아버지가 싫으면 자연스레 아버지의 정치 성향도 미워지기 마련이고, 심지어 직장 상사가 싫으면 그의 정치 성향도 거슬린다. 2030 청년세대의 마음도 이처럼 단순하지 않다. 그들의 감정은 복잡하고 미묘하며, 개인적 상처와 사회적 불만이 뒤엉켜 있다. 진짜 문제는 이런 청년을 진지하게 대하려 하지 않고, 그저 정치적 도구처럼 소비하는 정치인들의 태도다.

내가 윤석열을 비롯한 이른바 보수 참칭 정치인들이 말끝마다 청년세대를 외치는 모습을 보며 씁쓸함을 느끼는 이유는 이거다. 그들은 청년세대 중 일부가 정치적으로 자기편인 것 같으니 잠시 그들에게 엎어지는 척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 모습은 마치 50대 아버지가 싫어서 거리로 나온 20대 아들을 보며, 그 아버지의 아버지인 할아버지가 옆에서 “그래, 잘한다, 잘한다” 하고 부추기는 꼴과 다를 바 없다. 1980년대 학생운동을 바라보던 그 시절의 할아버지들은 적어도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식 때문에 속이 타들어 가는 자신의 아들을 먼저 안타까워했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만 묻자. 보수의 가치는 가족 중시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언제까지 세대 간 갈등에 기대 정치할 것인가. 이러니 보수 참칭이란 소리를 듣는 것이다. 제발 어설프게 트럼프 흉내 내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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