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자의 소소월드] ② 해학이 세상을 구한다
소소(小騷)월드: 소소하게 소란스러웠던 세계 이야기를 전합니다

개구리, 유니콘, 판다, 공룡, 곰돌이 푸…. 놀이동산이나 축제장에서 볼 법한 우스꽝스러운 대형 풍선들이 미국 거리를 알록달록하게 물들였다. 지난달 18일(현지시간) 미국 전역에서 열린 ‘노 킹스(No Kings·왕은 없다)’ 시위에서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권위주의적 행보에 맞서 시민 700만명이 전국 곳곳에서 거리로 나선 순간 “시위대는 테러리스트”라던 백악관의 주장은 힘을 잃었다. 익살스러운 대형 풍선을 뒤집어쓴 시위대와 예술적 감성을 담은 팻말을 든 사람들이 음악에 맞춰 시위를 즐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노 킹스’ 시위는 지난 6월 트럼프 대통령의 79번째 생일과 미 육군 창설 250주년을 기념하는 열병식에 맞서 워싱턴에서 시작됐다. 대통령을 군주처럼 떠받드는 듯한 행사에 반발한 시민들이 “미국엔 왕좌도, 왕관도, 왕도 없다”며 거리로 나온 것이다. ‘노 킹스’는 250년 전 영국 왕 조지 3세의 폭정에 맞서 독립을 선언했던 미국 건국 정신을 되새기는 구호이기도 하다.

하지만 건국 이념을 담은 근엄한 구호가 이내 위트와 유머로 변주됐다. 시작은 한 청년의 ‘풍선 시위’였다. 지난달 2일 미 오리건주 포틀랜드 이민세관단속국(ICE) 구치소 앞에서 강경한 이민 단속 정책에 항의하는 시위에 참여한 세스 토드(24)가 개구리 모양의 대형 풍선 복장으로 나타났다. “유머로 폭력에 맞서겠다”는 의미였다. 문제는 정부의 대처였다. 연방 요원이 토드가 입은 풍선 복장 공기 주입구에 화학 가스를 분사했다. 이 장면이 온라인에 퍼지면서 풍선 코스튬에 바람을 넣자는 ‘인플레이션(Inflation) 작전’ 챌린지가 시작됐다. 개구리 풍선 복장이 동나자 시민들은 차선책으로 유니콘·공룡·판다 등 다양한 풍선을 구매해 거리로 나왔다.

시위대는 트럼프 행정부의 권위적 이미지를 비튼 풍자 퍼포먼스로 저항의 미학을 확장했다. ‘미국의 상징’ 자유의여신상은 시민들의 단골 주제로, 일그러진 표정의 여신 그림과 여신으로 분장한 사람들이 거리를 활보했다. 르네상스 시대 군주의 초상화 양식으로 패러디된 트럼프 대통령의 그림과 그가 미성년자 성착취범 고 제프리 엡스타인에게 보낸 것으로 의심되는 ‘외설 편지’를 빗댄 팻말도 보였다. 수공예 작가인 비니센트 그린하이트는 포틀랜드 ICE 건물 앞에서 “뜨개질은 가장 평화로운 저항이자 매우 펑크한 행동”이라며 시민들에게 무료로 코바늘뜨기를 가르치면서 시위를 벌였다.

민주주의를 되찾기 위한 예술적·해학적 저항은 인류사 곳곳에서 이어져왔다. 1940년 찰리 채플린은 영화 <위대한 독재자>에서 히틀러와 무솔리니를 풍자한 캐릭터를 내세워 전체주의를 비웃었다. 1967년에는 베트남전 반전 시위 중 미국 청년들이 헌병의 총구에 꽃을 꽂으며 “사랑으로 평화를”을 외쳤다. 1980년대 폴란드에서는 시민들이 주황색 난쟁이 복장을 하고 거리로 나와 독재정권에 맞서는 ‘오렌지 난쟁이 혁명’을 펼쳤다. 그리고 우리나라 국민은 지난해 12월3일 불법계엄을 선포한 윤석열 전 대통령에게 맞서 시민들이 유머와 풍자를 무기로 삼았다. 뉴욕타임스는 “풍자가 한국 시위 정신의 일부”라며 “한국인들은 권력자들이 총과 칼을 들고나오는 상황에서도 풍자로 맞선다”고 소개했다.

시위에 유쾌함을 더하면 정말 더 큰 효과가 일어날까. 민주당 전략가인 앤디 바는 워싱턴포스트에 “모든 것이 어둡고 암울한 상황에서 재미와 흥미를 곁들이면 더 많은 참여를 끌어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브루스 케인 스탠퍼드대 정치학 교수는 “트럼프 대통령이 시위를 ‘반란’이라며 진압하려 해도, 폭력 대신 유머가 있는 현장에서 반란법을 발동하긴 어렵다”고 했다.
한편 미국 ‘노 킹스’ 시위대가 한국에 ‘긁힌(?)’ 일이 일어났다. 지난달 29~30일 방한한 트럼프 대통령이 국빈방문 일정 중 신라 금관 모형을 선물로 받았기 때문이다. 트럼프 정권에 방송 정지 처분을 받은 ABC 방송의 지미 키멜은 “그가 얼마나 조종하기 쉬운 사람인지 정말 부끄럽다”며 “어쩌면 한국에 남아서 왕이 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농담했다. 하지만 한국은 이미 손바닥에 ‘왕(王)’자를 적으며 권력 쟁취를 염원했던 지도자를 해학의 힘으로 축출했다. 이번엔 미국 시민이 해학의 힘을 보여줄 차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