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일 출간되는 천선란(32) 작가의 연작소설 『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허블)의 세 장면은 이렇게 그려진다. 총 3부로 구성된 소설은 시공간이 다르게 설정됐으나, 좀비 바이러스가 창궐해 지구가 멸망했다는 하나의 세계관을 공유한다.
#2097년, 이곳은 지구에서 320광년 떨어진 행성 ‘에르사’로 향하는 이주 우주선이다. 동면이 풀려 눈을 뜬 주인공 옥주에게 동료 메이린의 음성이 들린다. “옥주. 세상이 끝났어.” 떠나온 지구가 감염 사태로 멸망했다는 소식이다.
#좀비 사태가 발생한 지 5년쯤 된 지구. 이곳에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다. 주인공 제비는 정신 발달 장애를 가진 노윤과 살아가는 엄마 은미를 만난다. 은미는 노윤에게 말한다. “노래 멈추지 않아도 돼. 세상이 망해서, 의미가 없어졌어.”
#멸망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난 지구, 이곳엔 오직 좀비와 동식물만 남았다. 존엄사 직전 담당 의사가 감염되어버린 바람에 ‘나’는 혼수상태를 지나 오랜만에 눈을 뜬다. ‘나’는 좀비가 된 아내가 남긴 녹음을 켠다. “세상이 망했어. 아주 처참하게.”

지난 21일 동아시아 출판사에서 만난 천선란 작가는 “세계관을 만들었는데, 한 개의 삶만 보여주게 되면 늘 아쉽다”며 “하나의 세계관에도 여러 삶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 그런 매력이 있어 연작소설을 쓰게 된다”고 밝혔다.
작가는 2019년 민음사 황금가지의 온라인 소설 플랫폼인 ‘브릿G’에 장편 SF소설 『무너진 다리』를 발표하며 활동을 시작했다. 같은 해 장편소설 『천 개의 파랑』으로 한국과학문학상 대상을 받았고, 2020년 단행본으로 출간했다.
올해 10월 기준 48쇄, 20만 부 판매량을 기록한 『천 개의 파랑』은 휴머노이드 로봇이 보편화된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SF 소설로, 천선란의 대표작이다. 지난해 연극과 뮤지컬로도 만들어졌고, 지난 5월엔 워너브러더스 픽처스와 영화화 계약이 체결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단편·장편을 가리지 않고 매년 소설을 발표한 천선란 작가에게 『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는 특별한 작품이다. 한국과학문학상을 받기 전 허블과 계약해, 6년간 구상을 한 소설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에세이·인터뷰에서 좋아하는 장르로 꼽아온 “좀비 아포칼립스(Apocalypse) 장르”이기도 하다.
고대하던 소설을 마무리했다.
“데뷔작인 『무너진 다리』 연재를 하던 당시 『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의 1, 2부 격인 단편 연작소설을 발표했다. 그걸 보고 허블 마케터님이 연락을 주셨다. 그 후 우연히『천 개의 파랑』으로 한국과학문학상을 받게 됐다. 『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는 잘 마무리하고 싶은 작품이어서 계속 발표를 미룬 것 같다.”
작가는 퀴어 부부의 이야기를 다룬 3부 ‘우리를 아십니까’를 쓴 후 1부와 2부를 대폭 수정해 연작소설을 마무리했다. “세 번째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종말은 암울한 개념이지만, 정말 모두에게 불행한 일일까? 기존의 제도가 붕괴되었을 때 후련해지는 사람들이 있지 않나. 그런 인물을 떠올리면서 3부를 썼고, 1, 2부도 완성할 수 있었다.”

『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 속 인물들은 제도로 규정되지 않은 소수자성을 띤다. 1부엔 가정폭력의 경험을 공유하며 대안가족을 이루어 사는 이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2부엔 좀비가 휩쓸고 간 잔해 속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서로를 돌보며 사는 모습이 그려진다. 좀비 장르의 매력은 살리면서, 제도의 붕괴로 존재감이 더욱 뚜렷해지는 관계를 들여다 봤다. 각각의 인물들은 넓은 의미의 사랑을 나누는 사이다.
작품 속 인물들은 “세상이 망했다”고 표현한다. 어떤 감정으로 한 말일까.
“그 말 앞에 ‘드디어’라는 말이 생략돼있다. ‘빨리 일어나봐. 세상이 망했어. 네가 원했던 세상이야.’ 이런 의미로 썼을 거다. 무거운 느낌은 아니다.”
이번 소설을 쓸 때 특별히 달랐던 점이 있었나.
“『천 개의 파랑』을 발표한 후에는 ‘내가 작가로서 무엇을 쓰고, 어떤 메시지를 줘야 할지’를 고민했다. 연작소설 『이끼숲』(2023)과 장편소설 『모우어』(2024)를 쓸 때는 내가 좋아하는 것만 쓰자는 생각을 했다. 이번 『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는 그보다 더 자유로운 마음으로 썼다. 전엔 내가 세상을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에 소설을 썼다면, 요즘엔 사람들을 내 소설로 초대하고 싶어 쓴다.”

좀비 장르의 매력은 무엇인가.
“좀비는 인간만 느끼는 디스토피아(Dystopia)다. 좀비라는 존재엔 죽은 인간이 다시 살아나서 나를 찾아온다는 것에 대한 공포·불안이 내포돼있다. 대상을 향한 엄청난 그리움과 사랑도 있다. 얼마나 보고 싶으면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이야기를 하게 됐을까. 매력적이다.”
봤던 좀비 장르 중에 만족스러운 작품이 있다면.
“‘나는 전설이다’(2007)라는 영화가 있다. 리처드 매드슨의 동명 소설이 원작인데, 홀로 남아있는 인간의 고독을 잘 보여주는 좀비 장르물이라 좋다.”
소설가로서 앞으로의 목표나 계획이 있나.
“지치지 말고 쓰자는 생각뿐이다. 『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가 올해 마지막으로 발표하는 소설일 듯하다. 가까운 시일 안에 새로운 좀비 장르 소설을 만나볼 수 있으실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