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년 11월 탈북한 전 쿠바 주재 북한대사관 이일규 정무 참사가 지난달 29일 특별강연에 나섰다. 이날 강연을 듣기 위해 모인 외교·안보·정보 분야 전문가 30여 명은 고위급 탈북 인사가 전하는 북한의 최근 동향에 귀를 기울였다. 본격적인 강연에 앞서 필자가 참석자들을 한 명씩 소개하는데 건장한 청년 두 명이 낯설었다. 이일규 참사의 신변 보호를 맡은 경찰관들이었다.
김정일 비판하던 이한영 피살에
안가에 머물던 북한 외교관 SOS
‘새벽 인기척’ 확인하니 신문배달
보복 부인하며 흔적 남기는 수도

30여 년 전 필자도 신변보호관으로 활동한 적이 있다. 전문 무술 요원은 아니지만, 평소 연마한 무도(태권도 3단 등)를 바탕으로 전향한 공작원이나 고위급 망명자들을 주로 보호했다. 짧게는 몇 달, 길게는 몇 년까지 안전가옥에서 숙식을 함께 했다. 하루는 한국 온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은 북한 고위급 외교관이 필자에게 긴장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새벽에 누군가 아파트 문을 열려고 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북에서 나를 죽이기 위해 사람을 보낸 것이 틀림없어요.” 그의 얼굴은 창백했고 손은 떨렸다.
고위 탈북자 보호하다 느낀 인기척

그날은 필자가 그와 함께 한방에서 자기로 했다. 새벽이 되자 정말 누군가 문을 흔들었다. 바로 뛰쳐나갔지만,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문을 다시 닫고 거실로 들어서던 순간 발밑에 밟히는 것이 있었다. 신문배달원이 다녀간 것이었다. 그 시절 아파트 문 하단에는 신문이나 우유를 넣는 투입구가 있었는데, 배달원이 신문을 밀어 넣은 뒤 투입구가 자동으로 닫히면서 나는 소리가 문 여는 소리처럼 들렸던 것이다. 보복을 두려워하는 북한 고위 인사의 공포심을 실감했다.

‘비밀을 가진 누군가를 영원히 침묵시킨다. 적대국의 정보자산이 될 수 있는 인물은 사전에 제거한다. 배신자에겐 보복을, 잠재적 배신자에겐 경고를 보낸다.’ 스파이 세계 암살의 목적이다. ‘목적은 반드시 달성하되 흔적은 남기지 않는다. 누가 했는지 드러나지 않아야 한다. 사고사나 자연사로 위장되어야 한다.’ 스파이 세계 암살의 원칙이다.
그러나 러시아와 북한 같은 권위주의 정권에서는 암살의 목적이나 원칙이 한 가지 추가된다. 최고 권력자가 곧 체제의 상징이며, 권력자 개인에 대한 모욕은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된다. 최고 권력자의 권위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암살도 불사한다. ‘우리 소행임을 알게 하라’는 듯이 배후를 짐작할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추적이 가능한 흔적을 남긴다. 최고 존엄에 대한 도전은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는 공포의 시그널이다.
당직 근무 중 들어온 이한영 피격 보고

1997년 2월 15일 밤 국가안전기획부 수사국 당직실로 ‘경기도 성남시 분당에서 탈북자 한 명이 피습을 당했다’는 상황 보고가 접수됐다. 당시 당직관이었던 필자는 피습당한 이한영이 김정일 일가의 비리를 언론 매체에 폭로하고 다녔던 북한의 소위 ‘로열패밀리’ 출신이라는 점, 피습 시점이 김정일 생일(2월 16일)을 하루 앞둔 날이라는 점에서 이 사건이 ‘생일 이벤트’식으로 기획되었을 가능성을 의심했다. 더욱이 사흘 전(2월 12일)에는 북한의 고위 인사인 황장엽이 한국 망명을 요청한 상황이었다. 북한 정권이 체제 위기를 느끼고 강력한 경고 메시지를 보내려 했을 가능성을 떠올렸다. 이후 사건 현장에서 북한 공작원들이 사용하는 벨기에제 브라우닝 권총의 탄피가 발견되면서 누구라도 북한의 소행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됐다.
암살자는 이한영이 살던 14층 복도에 대기하고 있다가 그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순간 권총으로 이마를 정확히 저격했다. 이것은 ‘제거’라는 단순한 의미를 넘어서 ‘배신자에 대한 공개처형’이라는 상징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북한 체제에 위협이 되는 자는 누구든, 언제 어디서든 반드시 제거한다는 강한 경고 메시지였다. 특히 황장엽 같은 고위급 망명자들에게 심리적 압박을 가하기 위해 충분히 연출된 것일 수 있었다.
푸틴 비판 뒤 의문사한 스파이

“배신자는 언젠가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돼 있다. 그들은 단지 체제를 거스른 자가 아니라 국가 기강을 뒤흔드는 썩은 영혼의 소유자로 간주한다.” 러시아 푸틴 대통령만큼 반역자나 권위에 도전하는 자들을 집요하게 추적하는 지도자는 없다. 전직 미국 정보관 협회(AFIO)가 발간하는 정기 간행물 『2024년 여름-가을호 The Intelligencer』에 실린 ‘반대는 치명적이다-푸틴의 탄압 캠페인’에 따르면 푸틴에게 어떤 형태로든 반대 의사를 보였다가 암살되었거나 암살 시도 대상이 되었거나 투옥된 이들이 630명을 넘는다.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는 러시아 연방보안부(FSB)에 재직 중이던 1998년 FSB가 반체제 인사 암살을 지시했다고 폭로했고, 2000년 영국으로 망명했다. 그는 이후 여러 인터뷰에서 푸틴을 “살인자” “범죄조직의 수장”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2006년 11월 런던의 한 호텔에서 방사성 물질 폴로늄-210에 의해 독살당했다.
세르게이 스크리팔은 러시아군 정보기관(GRU) 소속 이중 스파이로, 영국을 위해 간첩 활동을 하다 체포된 후 2010년 포로 교환을 통해 영국으로 망명했다. 그는 2018년 주거지 인근 쇼핑몰에서 러시아가 개발한 신경작용제 ‘노비촉’에 중독되었고, 생명은 건졌지만 심각한 후유증을 앓고 있다.
러시아는 리트비넨코와 스크리팔 사건 모두에 대해 암살 혐의를 강하게 부인하면서 서방의 조작된 정치적 음모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암살에 사용된 물질이 남긴 흔적은 명확히 러시아를 가리킨다. 리트비넨코에게 사용된 폴로늄-210은 자연에 거의 존재하지 않는 극독성 희귀 방사성 동위원소다. 러시아 국영 원자력 기관의 통제 없이 입수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스크리팔에게 사용된 노비촉 역시 소련 시절 군용으로 개발된 극초강력 화학무기로, 러시아 GRU 외에는 제조 및 사용이 거의 불가능한 물질이다. 러시아는 이러한 의혹을 철저히 부인하면서도 동시에 모두가 알 수 있도록 흔적을 남긴다. 암살자가 잡히지 않아도 배후에 러시아가 있다는 묵시적 공감대는 전 세계적으로 형성된다. 이것이 바로 러시아가 선택한 전략이다.
“그 누구도 우리를 막을 수 없다.” “반역자에게는 어디에도 피할 곳이 없다.”
러시아는 은폐와 과시를 동시에 수행하는 모순적인 전략을 통해 망명지조차 안전지대가 아님을 국내외 정보 요원들에게 주지시킨다. 이는 단순한 보복이 아니라 러시아 안보 체계의 무서움과 무자비함을 드러내는 정치적 메시지다. 푸틴은 이러한 전략을 통해 “배신자에게는 관용이 없다” “나는 국가 안보를 지키는 강한 지도자다”라는 이미지를 공고히 하고 있다.
장석광 국가정보연구회 사무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