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일 오후 7시 40분 KBS1 ‘한국인의 밥상’ 707회는 ‘“인생을 빚다. 세월을 달래다” 익어 가는 아버지의 술상’이 방송된다. 애정 가득 전통주와 가장의 무게를 달랜 술상이 돌미나리전·술지게미수육·연푸국과 함께 소개된다.
고단했던 삶의 위로를 건네준 한 잔. 정성으로 빚고 세월이 깊은 맛과 향을 내는 우리네 인생이 담긴 밥상을 만나러 가본다.
아버지의 밥상에는 늘 막걸리 한 잔이 같이 올랐다. 고단했던 하루를 잊게 해주고 내일을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해주는 힘, 아버지에겐 막걸리가 그냥 술이 아니라 고단함을 달래주던 진통제였다. 그래서 어머니는 때가 되면 정성껏 술을 빚고, 막걸리와 잘 어울리는 끼니와 안주를 만드는 것으로 아버지의 고달픈 삶을 위로했다.
인생의 크고 작은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눈 아버지의 술상. 그 위에서 익어가는 세월의 깊이와 묵묵히 삶을 지탱해 온 우리 삶이 담긴 이야기를 만나본다.
■ 울고 웃고, 막걸리에 담긴 인생 – 경기도 양평군
경기도 지평면에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양조장이 있었다. 물맛이 좋아서, 예로부터 막걸리 맛이 좋기로 유명하다. 전국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양조장은 이전했지만, 마을 사람들은 때가 되면 여전히 막걸리를 빚고 있다.
모내기 철을 앞두고, 농번기 때 새참으로 내갈 막걸리를 만드느라 분주하다. 막걸리를 만들 땐 고두밥을 잘 식혀야 술이 쉬지 않는단다. 정성스레 고두밥에 누룩을 섞어서 닷새 정도 숙성하면, 막걸리가 만들어진다. 막걸리 좋아하는 아버지 때문에, 남편 때문에 속앓이했다면서도 계속 술을 빚는 건, 막걸리가 어떤 의미인지 잘 알기 때문이다.
봄이 되면 밭고랑에 돋아나는 돌미나리가 아버지의 술상에 올랐다. 전을 부쳐서 막걸리를 곁들이면, 쌉쌀한 향이 찰떡궁합을 자랑한다. 남편에게 잔소리하면서도, 어머니는 매일 아침 북어를 두드렸다.
기름을 두르지 않고, 북어포에 밀가루옷을 입히고 달걀에 버무려 국을 끓이면, 담백한 국물에 깊은 맛이 우러났다. 가족을 위해 자식을 위해, 묵묵히 일하던 아버지의 고단한 인생과 어머니의 위로가 담긴 술상. 지평 마을의 막걸리에는 고단한 시절을 함께 이겨낸 끈끈한 가족애가 담겨있다.

■ 아빠의 청춘, 아들의 인생이 담긴 양조장 – 충청남도 청양군
칠갑산 자락 아래, 청양에서 가장 오래된 양조장이 있다. 이곳의 일곱 번째 주인인 권경남 씨(72세)는 열여섯 어린 나이에 양조장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양조장에서 일하는 친구에게 놀러 가 술밥을 얻어먹으며 고픈 배를 채웠는데, 그게 인연이 돼서 평생 막걸리를 떠나지 못했다. 막걸리를 유통하며 전국에 배달 다니던 경남 씨의 꿈은 ‘나만의 양조장을 갖는 것’이었다. 그 간절한 꿈을 20여 년 전 이루었지만, 건강이 쇠약해진 탓에 요즘 걱정이 많다. 그래도 아들이 아버지의 꿈에 기꺼이 함께해서 그렇게 든든할 수 없단다. 옛날 방식을 고수하는 탓에 손이 많이 가지만, 아들 순오 씨(36세)는 아버지의 삶이 담긴 그 방식을 말없이 따르고 있다.
막걸리에 인생을 건 부자를 위해 아내 김은옥 씨(63세)는 시간이 날 때마다. 정성스럽게 막걸리에 곁들이는 음식을 준비한다. 막걸리를 만들고 난 뒤 나오는 술지게미에 고기를 하루 재웠다 만드는 술지게미 수육은, 잡내 없이 부드러운 맛이 일품이다. 4월 초가 되면, 딱 한 달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구기자 순이 올라온다. 사과 채를 썰어서 상큼하게 무쳐서 수육에 곁들이면, 양조장에서만 맛볼 수 있는 최고의 막걸리 안주가 탄생한다.
다섯 살 때 돌아가셨던 친정아버지가 제일 좋아하셨던 초계 무침도, 남편을 위해 종종 만드는 안주. 은옥 씨의 손맛 덕분에 고단한 양조장 일도 버틸 수 있다는 아버지와 아들, 양조장에 청춘을 건 두 부자의 막걸리 인생을 만나본다.

■ 남편 때문에 빚기 시작한 술, 인생의 향기를 담다 – 경기도 양주
처음에 술을 빚기 시작한 건 술 좋아하는 남편이, 조금이라도 건강한 술을 마셨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수원 백씨 문중의 전통주를 복원한 김영자 씨(76세)의 술 인생은 술 좋아하는 남편의 건강때문에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궁중 연회에 올랐던 벼누룩 술은 250년 전 궁중 나인에 의해 수원 백씨 문중에 전해왔는데, 어느 순간 명맥이 끊겼다. 처음에는 누룩을 제대로 발효시킬 줄 몰라 기껏 만든 술을 버리기 일쑤였다. 그리고 10여 년 연구 끝에 되살아난 벼누룩 술은 맑은 자태와 산뜻한 과일 향을 자랑한다.
벼누룩 술은 집안 제사에 올리는 녹두전과 찰떡궁합을 자랑한다. 음식에 있어서도 예의와 품격을 중요하게 생각하셨던 시어머니는, 전을 부칠 때 밀가루를 절대 사용하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그래서 녹두를 정성껏 맷돌에 갈아 고사리와 김치를 올리는 시어머니의 방법 그대로 ‘녹두전’을 부친다.
마을에서 크고 작은 일이 있을 때는, 막걸리와 함께 ‘연푸국’을 냈다. 북어로 국물 내고 좁쌀 가루를 푼 다음, 두부를 나박나박 썰어서 만든 ‘연푸국’은 죽에 가까운 형태다. 뜨끈한 국물에 두부로 속을 든든하게 채울 수 있어서 막걸리 안주로도 그만이란다.

시어머니에게 혼나는 날이면 시아버지가 몰래 구워주시던 ‘가마솥통닭구이’도 그 시절을 생각나게 하는 추억의 맛이다. 오래된 기억과 시간을 담은 며느리의 술상. 기쁨을 나누고 고단한 삶에 위로를 건네는 밥상을 만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