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짓겠다고 남은 젊은 애들이 걱정이야”

2025-01-06

농민들은 ‘위기의 시대’를 살아간다. 도시 사람들은 이 위기를 모른다. 수입 농산물은 가격 위기를 불러왔다. 초고령화로 소멸 위기에 빠졌다. 기후위기 때문에 매해 농작물 피해를 본다. 농민들은 ‘복합위기’라고 했다.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 출범부터 2025년 현재까지 30년간 쌓여온 위기다. 이들은 어떤 30년을 지냈을까. 한국인 먹거리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전남 신안의 쌀농가, 충남 홍성 양돈농장, 경북 김천 포도농가, 경남 남해 마늘농가를 찾았다.

쌀과 짱뚱어

전남 신안의 북쪽 섬 ‘지도(智島)’. 뭍인 전남 무안 해제면과 300m도 안 되는 짧은 제방으로 이어진 연륙도다. 예전 지도와 해제 사이엔 갯벌이 있었다. 1980년대 초 목포의 버스회사가 갯벌을 메워 간척지로 만들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논이 330만평(1090.90㏊). 여의도 3배가 넘는다. 토박이 이현충씨(68)가 말했다. “어업이라 해봤자 뻘(펄)에 있는 짱뚱어 잡는 거여, 여긴 나락으로 먹고살제.”

이씨와 주민들은 버스회사가 해제로 가는 동쪽 갯벌을 간척할 때 서쪽 갯벌을 메웠다. 논과 언덕에서 파낸 붉은 황토로 질펀한 개흙을 덮었다. 벼를 재배할 수만 있다면, 합법이든 불법이든 간척이 용인되던 시절이었다. 이씨는 그렇게 늘어난 800평(0.26㏊)을 더해 총 1만평(3.30㏊) 논에서 벼농사를 지었다. 추수를 끝낸 겨울 논에는 보리를 키웠다.

농산물 시장 개방을 앞둔 1990년대 초에는 머리를 밀고 시위에 나갔다. “공산품 수출하려고 농산물 시장을 열겠다는 거 아닌가. 그래도 농업의 기본은 쌀인디 막무가내로 풀면 다 죽는디. (저렴한 외국 쌀이 수입되면) 경쟁이 안 된당게.” 1995년 WTO 출범으로 한국은 농산물 시장을 열었지만 쌀만큼은 시장 개방을 뒤로 미뤘다. 한국이 쌀 시장을 개방한 건 2015년이다.

그사이 벼농사만 크게 짓는 전업농이 늘었다. 이씨는 한때 ‘대농’으로 불렸지만, 이제는 1만평의 서너 배 이상은 지어야 대농 축에 낀다. “잉. 영철이 정도는 지어야 대농이제.” 옆 동네 사는 후배 최영철씨(62)는 버스회사 간척지 10만평(33.05㏊)을 빌려 벼농사를 짓다가 최근 규모를 줄이고 정미소를 열었다. 다만 여전히 2000~3000평 정도를 경작하는 소농들이 다수다. 농사짓겠다고 지도읍에 남은 청년 박시만씨(36)는 밭만 일구다 지난해 처음 논을 부쳤다. 그는 2400평(0.79㏊)을 빌려 벼농사를 한다.

고품종 쌀도 개발됐다. 전남에선 새청무, 전북에선 신동진, 충남에선 삼광미, 경남에선 새일미 등이 보급됐다. 밥맛 좋고 수확량도 우수한 품종들이다. 일본의 고시히카리나 아키바레가 부럽지 않을 정도였다. 다만 각 도에서 한두 품종을 재배하다 보니 병충해 하나가 발생하면 크게 번졌다. 2021년에는 잎이 하얗게 마르는 도열병이 전북에 퍼졌는데 대부분이 신동진에서 나왔다. 정부는 고품종 쌀 일부가 수확량이 너무 많다는 이유를 들어 퇴출 대상 품종으로 지정했다.

친환경 농법도 보급됐다. 이씨는 새청무 벼를 우렁이 유기농법으로 짓는다. 어린 왕우렁이를 뿌려 논에 자라는 피를 잡는 농법이다. 이렇게 키운 우렁이쌀은 비싼 값에 팔린다. 남미가 원산인 왕우렁이는 원래 3~5년을 살지만, 남미 국가들보다 기온이 낮은 한국에서는 겨울을 나지 못한 채 죽는다. 우렁이 수요가 매년 늘어나자 우렁이를 직접 키워 보급하는 농가도 생겼다.

1~2년 전부터 분위기가 달라졌다. 겨울이 따뜻해지면서 신안에서 우렁이가 월동을 시작했다. 이듬해 훌쩍 자란 우렁이가 모내기한 모까지 갉아 먹었다. 이제 신안 농약사에서는 우렁이 잡는 약을 판다. 기후위기 시대에 우렁이 농법은 퇴출 위기에 놓였다.

우렁이 농법이 퇴출되면 남는 건 오리 농법 정도다. 모내기한 논에 새끼오리를 풀면 오리가 모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잡초를 먹는다. 충남 홍성에서 시작한 오리 농법은 2008년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퇴임 후 지내던 경남 김해 봉하마을로 전파되면서 전국에 퍼졌다. 조류인플루엔자(AI) 확산 우려에 지자체들이 오리 농법 지원을 끊으면서 지금은 일부 지역에서 명맥만 유지한다.

지난해 10월25일 오전 9시. 이씨의 추수날이었다. 벼를 수확할 작업반이 콤바인 두 대를 가지고 왔다. 예전 같으면 후배 최영철씨에게 콤바인을 빌려 직접 수확했을 테지만, 2년 전 허리 수술을 한 뒤에는 작업반에게 맡긴다. 논 1만평 콤바인 작업에 300만원, 트랙터는 300만원, 이앙기는 150만원, 모판 작업에 300만원… 벼농사는 물꼬 관리를 빼고는 거의 모든 농작업이 기계화, 서비스화됐다. “농사가 자기 인건비 벌어먹기요. 근데 몸이 망가지다 보니 내 품을 팔 수 있는 여건이 물관리하는 것밖에 없제. 남는 건 더 적어졌어.”

이씨는 이날 논 1만평 중 8000평에서 수확한 벼 17t을 북신안농협 미곡종합처리장(RPC)에 넘겼다. 벼를 팔아 번 돈은 2370만원. 벼 40㎏ 기준 5만5000원꼴이다. 이씨가 “다들 쌀값이 낮다고 아우성인데 전남은 전국 최저 수준”이라고 말했다. 쌀값이 낮은 건 논 면적 감소로 쌀 생산량이 줄어든 것 이상으로 수요가 줄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쌀 시장 개방 유예의 대가로 매년 의무적으로 수입해야 하는 외국 쌀 40만8700t이 쌀값 하락을 부추겼다.

윤석열 정부는 쌀이 너무 많이 생산된다며 올해 재배면적을 8만㏊ 줄이겠다고 발표했다. 논에 다른 작물을 심으면 보조금을 주는 사업(전략작물직불제)도 진행한다. 예컨대 논에 벼가 아닌 콩을 심고, 이어서 겨울에 밀까지 심으면 평당 1155원의 보조금을 준다. 다만 쌀 재배면적이 어느 정도 줄지, 콩과 밀이 얼마나 늘지는 미지수다. “농부들이야 돈 된다고 하면 별 농사를 다 해. 근디 콩은 물빠짐이 좋은 논에서야 가능하제. 아무 논에서 헐 수가 없어. 밀은 팔 곳 있는가? 돈으로 바꿀 때 힘들당게…”

과거에도 이름만 다른 같은 사업(2003~2005년 쌀 생산조정제, 2011~2013년 논 소득기반 다양화사업, 2018~2020년 논 타작물 재배 지원사업)이 진행된 적이 있다. 이 사업들로 늘어난 작물이 판로가 없어 가격이 폭락하거나, 쌀 생산이 줄어 가격이 오르면 사업이 폐지됐다. 긴 안목으로 쌀 생산량을 조절하기보다 급한 불만 꺼온 셈이다.

자경농인 이씨가 벼를 팔아 번 돈 2370만원에서 각종 비용을 제하면 1200만원 정도가 남는다. 여기에 농사 면적에 따라 받는 직불금 600만원과 국민연금, 기초노령연금을 더하면 생활하기에 큰 문제는 없다고 했다. 밭에서 나온 콩으로 된장을 만들어 팔고, 수확한 양파를 가공해 팔기도 한다.

임차 대농인 최영철씨도 10만평에서 생산한 쌀을 팔아 매년 2억7000만원 정도 매출을 올렸다. 논 주인인 목포 버스회사 회장 일가에 임차료 1억2000만원을 주고 생산비를 제하면 500만원쯤 남는다. 여기에 면적 직불금 5700만원을 더하면 연 수입은 6200만원 수준이다.

이씨는 “나는 자식도 출가했고 이 정도면 충분히 먹고살제. 문제는 여기서 농사짓는다고 남아 있는 시만이 같은 젊은 애들”이라고 했다. 박시만씨는 논 2400평에서 지난해 4월부터 11월까지 7개월 벼농사로 140만원 순익을 냈다. 쌀로 먹고살기 어렵다 보니 밭에서 양파를 키워 돈을 번다. 박씨는 “논은 100마지기(2만평·6.61㏊) 이상은 지어야 먹고살 수 있겠다”며 “언제쯤 논 100마지기를 지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목포 버스회사 회장 일가의 간척지에는 태양광 발전단지가 들어설 계획이다. 태양광 업체들이 논 일부를 빌려 발전소를 짓겠다며 산업통상자원부에 발전사업 신청서를 냈다. 신안의 논이 태양광 발전단지로 바뀌면 박씨나 최씨 같은 임차농은 갈 곳을 잃는다. 이미 인근 염전은 상당수가 태양광 단지로 바뀌었다. 최씨가 말했다. “염전 쪽 마을은 이제 사람도 없어요. 태양광 설비 점검하는 기술자만 길을 오가요.”

지도읍에서 쌀농사가 사라지면 마을 정미소, 농협 RPC, 콤바인 작업반 등도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이곳에서 나락은 짱뚱어와 비슷한 처지로 전락할지도 모른다. 짱뚱어탕 식당 외에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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