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둥(毛澤東)은 중국 창사(長沙) 사범학교 시절에 스승 양창지(楊昌濟)의 집을 드나들면서 그의 딸 양카이후이(楊開慧)를 사랑하게 된다. 부모의 반대에도 결혼해 아들 마오안잉(毛岸英·1922~1950)을 낳았다. 혁명 와중에 아내는 고향에서 국부군에 붙잡혔다. 전향을 거부하다가 처형됐는데 당시 아들은 8세였다.
그 뒤 마오안잉은 모스크바로 유학해 기계 기술자가 되어 돌아왔다. 아들을 본 마오쩌둥은 혁명가의 아들은 농민을 알아야 한다며 시골로 보냈다. 아들이 농사지은 고구마를 아버지에게 보여주자 마오쩌둥은 고구마는 쳐다보지도 않고 아들의 손을 매만지며 “열심히 살았구나”라고 격려했다. 1949년 10월 미녀 배우 류쑹린(劉松林)과 결혼시켰다.
이듬해 북한의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시작되자 마오쩌둥이 아들에게 말했다. “전쟁에는 지도자의 아들이 먼저 가야 한다.” 포로가 되면 난처하다며 참모들이 말리자 마오쩌둥은 “그는 마오쩌둥의 아들이다”라고 말했다. 마오안잉은 한국전쟁에 지원해 평안북도 동천군에서 미군의 폭격을 맞아 28세에 사망했다.
펑더화이(彭德懷) 사령관이 차마 마오쩌둥에게 직보하지 못하고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에게 연락했다. 저우언라이가 보고하자 마오쩌둥은 “시신은 확실하던가”라고 물었다. 여느 필부처럼 자식을 잃은 아픔을 그렇게 표현했다. “예. …. 고향에 묻어줄까요?” “아니요. 전사는 죽은 자리에 묻어주는 법이오.” 그래서 마오안잉은 숨진 자리에 묻혔다.
마오쩌둥이 한국전쟁에서 남의 집 자식을 수없이 죽였다. 그 사실을 빼더라도 자기 나라 청년 122만 명을 사지에 몰아넣었다. 15만 명의 젊은이가 목숨을 잃었으며, 80만 명이 장애인이 되었거나 생업을 잃었다. 그리고 씻을 수 없는 남북 분단 고착화를 남긴 것이 야속하고 한스럽다. 마오쩌둥은 지하에서 지금도 자신의 처사가 옳았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