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봄은 헌재에서 피어난다

2025-03-25

하늘을 이고 있는 산들이 불타고 있다. 거대한 화염이 태양을 가렸고, 시뻘건 화마는 동물들 비명마저 삼켰다. 집채만 한 불더미가 날아다녔다. 천년 동안 기도가 끊이지 않았던 고찰도, 마을을 지키던 당산목도 속절없이 무너졌다. 산청, 의성, 울산, 안동, 하동 지역을 굽어보던 산들은 영묘한 자태를 잃고 검은 숨을 내뱉고 있다. 저 숲들은 왜 우리 시대에 사라져야 하는가.

이리저리 불덩이를 던지는 바람은 무자비했다. 언론은 뜨거워진 바다에서 발생한 덥고 건조한 ‘마른바람’이 몰아쳤다고 한다. 마른바람! 비가 오지 않는 마른장마, 눈이 오지 않는 마른강치(강추위)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마른바람이 이토록 무서운 줄은 몰랐다. 지금 남녘을 휩쓸고 있는 바람에 어떤 것이 들어 있길래 이리 난폭한 것인가. 분명 만물을 일으켜 세우는 봄바람이 아니다. 봄바람은 보이지 않아도 보였다. 봄 언덕에서 맞던 바람은 풋내가 나면서도 달큼했다. 바람 그 속에는 야릇한 설렘이, 분홍빛 속삭임이 들어 있었다. 새 울음이, 꽃소식이, 사랑하는 사람의 안부가 들어 있었다. 하지만 마른바람은 판독할 수가 없다. 두려울 뿐이다.

산이 불타는 시각에 서울 한복판에서도 불들이 넘실거렸다. 대통령 탄핵 찬반 집회장에는 여전히 욕설과 막말이 쏟아졌다. 그 위로 미세먼지가 자욱했다. 상대편을 적으로 여기며 퍼붓는 저주의 말들이 부서져 하늘을 덮고 있었다. 지난겨울은 마른바람이 끊이지 않았다. 그 바람은 용산에서 발생했다. 현직 대통령이 일으킨 내란의 광풍이었다. 시민들의 항거에 ‘계엄의 왕’은 되지 못했지만, 바람은 더욱 거세졌다. 집단지성을 믿었건만 시간이 지날수록 집단광기가 거리를 장악했다. 으뜸 가르침이라는 종교도 사탄의 무리가 벌인 아스팔트 위의 굿판에서 불에 탔다. 상대를 악마라 부르며 자신들이 악마가 되어가는 현장을 보았다. 알 수 없는 것이 인간이었다. 새 아침이 독재자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떠오르는 태양은 민주주의를 말살시키려는 자들과 내통하는 것처럼 보였다. 생소한 비탄이 가슴을 짓눌렀다. 집단광기는 무슨 일이든 저지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이성은 지닌 것 자체가 아픔이었고, 민주화 투쟁의 따뜻한 기억들도 불에 그을렸다. 삼계화택(三界火宅), 중생이 사는 이 세상이 불타는 집이었다.

오늘도 이쪽저쪽에 증오와 혐오를 끼얹는 마른바람이 불고 있다. 광풍에 상식과 양심, 포용과 배려가 실종되었다. 잘못된 모든 것을 네 탓으로 돌리다 보니 너도나도 법을 찾았다. 법은 도덕과 상식으로 해결되지 않을 때 찾는 마지막 보루여야 하지만 공격의 첫 번째 도구가 되어버렸다. 법정이 붐비고 법전이 두꺼우면 인심이 사나워졌음이다. 노자가 이미 가슴이 없는 법의 날카로움을 간파했다. “위정자의 기교가 많을수록 사악한 일들이 발생하고, 법령이 삼엄할수록 도적들이 들끓는다.”

그럼 막다른 길에서 ‘믿을 수밖에 없는’ 법은 바르게 살아있는가. 혹 법관이 정의를 비틀고 민의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중립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누군가를 편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진정한 중립을 위한다면 중립을 지키려는 이유가 어느 한쪽을 편드는 명분보다 명확해야 한다.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양비론이다. 양비론은 실상 서로를 자극할 뿐이다.

교황청 성직자부 장관 유흥식 추기경이 지난 21일 바티칸에서 영상담화를 보내왔다. 헌법재판소에 보내는 간곡한 당부였지만 위기에 처한 모국을 위해 올리는 간절한 기도였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고통에는 중립이 없다’라고 말씀하셨다. 이와 마찬가지로 정의에는 중립이 없다. 도저히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로 가족과 이웃이 싸우고, 수없이 많은 상점이 폐업을 하고, 젊은이들은 어디서 미래를 찾아야 할지 모르고 있다. 빠른 시일 내에 잘못된 판단과 결정을 내린 사람들에 대한 시시비비를 가려 달라.” 헌재가 제대로 답할 것으로, 그래서 헌법을 지켜줄 것으로 믿는다. 헌재의 정의로운 심판만이 증오와 혐오의 불덩이를 퍼뜨리는 마른바람을 멈출 수 있다.

산의 나라에서 산이, 민주공화국에서 민심이 불타고 있다.

산불은 비가 내리면 꺼질 것이다. 하지만 우리 마음속 증오와 혐오의 불은 언제 꺼질 것인가. 이 땅에 봄바람은 언제 불어올 것인가. 모두가 헌재를 바라보고 있다. 이 땅의 봄은 헌재에서 피어난다. 당연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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