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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그를 처음 만난 건 40여년 전의 일입니다. 남원 촌놈이 태어나서 처음 서울에 올라오던 날이었지요. 남원역에서 통일호 기차를 타고 서울역에 내렸습니다. 아버지를 따라 물어물어 서울역 건너편으로 가서 버스를 탔습니다. 교문을 들어서는 순간 꿈에 그리던 풍경이 나타났지요. 돌로 지어진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마치 ‘대학이란 이런 곳이야’라고 알려주는 듯했기 때문이지요. 그 건물들 정면에 머리와 어깨에 하얗게 눈을 뒤집어쓴 그가 서 있었습니다. 바로 ‘인촌 김성수 선생’입니다.
입학 후에 보니 고려대학교 교내에는 그의 묘소도 있었습니다. 학교 뒤편 고즈넉한 곳에 있었는데 ‘인촌묘소’라고 불렸지요. 당시에는 학생들의 데이트나 동문회 장소로 자주 이용되었습니다. 그의 묘소는 1987년경 남양주시로 이장되었고, 그 자리에는 ‘인촌기념관’이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왜 고려대학교 안에 그의 동상과 묘소가 있었을까요.
선생은 1891년 고창군 부안면 인촌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선생의 집안은 당시 조선에서 가장 대표적인 지주 집안이었지요. 담양에 있는 창평 영학숙과 부안에 있는 내소사에서 공부하다가 일본으로 유학해 1914년 와세대대학을 졸업했습니다. 이후 1915년 중앙학교를 인수해 1917년 교장으로 취임했습니다. 1919년에는 3·1 운동에 참여해 자신의 집을 회합 장소로 제공하기도 했지요. 그해 10월에는 경성방직을 설립해 운영했고, 다음 해에는 동아일보를 설립해 사장으로 일했습니다. 여러 사회활동을 하던 선생은 1932년 3월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한 뒤 1932년 6월부터 1935년 6월까지 교장으로 활동했습니다. 보성전문학교는 1946년 고려대학교로 전환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고려대학교 교내에 선생의 동상과 묘소가 있던 이유이지요.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 1936년 동아일보도 일제에 의해 발행이 중지됩니다. 바로 ‘일장기 말소 사건’ 때문이지요. 때문에 선생도 사장이던 송진우 선생과 더불어 동아일보 취체역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그러다가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친일 행적을 보이게 되는데요. 친일 강연을 하고 국방헌금을 낸 것이 대표적입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이름을 올린 이유이지요.
해방 후 선생은 제2대 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는데요. 재직 당시 ‘각하’라는 호칭을 폐지했는데, 선생이 물러나자 다시 부활했다고 합니다.
서울에는 고려대학교 이외에 세 곳에 선생의 동상이 있습니다. 먼저 중앙고등학교입니다. 1915년 경영난으로 폐교 위기에 처한 중앙학교를 인수해 민족사학으로 육성한 선생의 뜻을 기린다는 의미로 세워졌습니다. 과천 서울대공원에도 1991년 선생의 동상이 세워졌는데요.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건립했습니다. 청계천 입구 동아미디어센터에도 선생이 40대 초반의 모습으로 있는데요. 동아일보를 설립해 운영한 업적을 기리는 취지입니다.
최근 105세 철학자 김형석 교수님께서는 자신이 만난 사람 중 인격과 인간관계에서 제일 훌륭한 분이 인촌 선생이었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이기주의 배격, 선의의 경쟁과 결과에 대한 승복, 사회에 헌신하기 위한 후학 양성의 중요성 강조 등이 인촌 선생이 강조하신 덕목이라고 하셨는데요. 어쩌면 지금 우리 사회에 가장 필요한 덕목 아닐까요.
양중진 법무법인 솔 대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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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촌 김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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