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스와 만성질환....사회적 차별과 빈곤이 만드는 건강 격차[BOOK]

2025-04-11

불평등은 어떻게 몸을 갉아먹는가

알린 T 제로니머스 지음

방진이 옮김

돌베개

1985년 미국의 인종별 기대수명은 흑인 69.3세, 백인 75.3세로 6년 차이가 났다. 그해 미국 보건복지부에서 펴낸 ‘해클러 보고서’는 심혈관질환‧암‧당뇨‧저체중아출산‧영아사망률 등 다양한 보건 요인에서 ‘인종에 따른 건강 격차’가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미 보건복지부는 이러한 격차의 완화‧해소를 국가보건의 최우선 목표로 잡았다. 환경‧유전 위험인자 교육, 건강습관과 생활양식 개선 등 다양한 사업에 나섰다. 하지만 이후 격차는 오히려 더 벌어졌다.

왜 그럴까? 미국 시카고대 보건대학원 교수이자 이 대학 인종‧문화‧건강 연구소 연구교수인 지은이는 실증연구를 바탕으로 ‘웨더링(Weathering‧침식‧마모‧풍화)’이라는 가설을 제안한다. 소수자 차별 등 사회적 이유가 장기간에 걸쳐 건강에 악영향을 준 결과라는 가설이다. 여기서 그 대상은 흑인‧백인‧동양인 등 인종적 분류에 그치지 않고 ‘힐빌리’로 불리는 극빈층 등 소외계층을 망라한다.

지은이는 초기 연구에서 흑인 산모의 연령이 증가할수록 출산결과가 열악해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영아는 엄마 나이가 많을수록 사망률이 높고, 건강도 좋지 않았다. 지은이는 그 이유를 분석해 ‘흑인 여성이 경험하는 인종차별이 축적된 결과’ 때문이라는 웨더링 가설을 1992년 내놨다.

이를 바탕으로 지은이는 미국에서 문화적 억압‧소외와 경제적 착취를 당하거나 어려운 처지를 겪는 다양한 정체성의 사회집단의 건강 영향을 연구해왔다. 문제는 심각했다. 연구팀은 정부 재정지원이 끊긴 극빈곤지역 흑인청년이나 이와 유사한 가난한 지역 백인청년이 장애가 없는 채로 살아남아 50세 생일을 맞을 확률은 50%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발견해 저명한 의학 학술지에 발표했다. 인종은 물론 소득에 따른 건강 불평등도 확인한 셈이다.

특히 뉴욕‧LA‧시카고‧디트로이트의 극빈층 거주지 흑인 청년의 건강 기대수명은 같은 대도시 부유한 지역 청년대와 비교해 수십 년이나 차이가 났다. 과학적 연구 결과 흑인 청년의 주된 사망 원인은 흔히 살인‧사고‧에이즈‧약물과다복용 등을 떠올리는 선입견과 달리 총이나 주삿바늘이 아닌 만성질환으로 나타났다.

이는 코로나19 팬데믹에서도 드러났다. 모든 사람이 보건적‧의학적‧사회적 충격을 당했지만 피해는 공평하지 않았다. 미국인 전체 기대수명이 1.4년 줄었는데, 아메리카 원주민은 평균 4.5년, 흑인과 히스패닉은 3년, 백인은 1.2년으로 편차가 상당했다.

그렇다면 사회적 차별과 빈곤은 어떻게 장기간에 걸쳐 정신‧신체에 작용해 인간의 노화와 질병, 수명에 악영향을 주는가. 지은이는 소외계층이 오랫동안 차별과 빈곤에 노출되면서 끊임없이 받은 ‘스트레스’에서 원인을 찾는다.

지은이는 웨더링의 생물학적 이유를 진화과정으로 설명한다. 인간의 몸은 적의 공격 등 목숨이 위협 받는 위기 상황을 당하면 이에 대처하기 위해 스트레스 호르몬이 급속히 분비되고 활성화하도록 진화했다. 이 호르몬이 쏟아지면 심장 박동과 호흡이 증가해서 적과 싸우거나 도망치는 데 필수적인 근육 작동에 필요한 산소와 지방‧당분 등의 에너지를 빠르게 운반하게 해준다. 이러한 스트레스 호르몬 분비와 위기대응 시스템은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주 짧은 시간에 작동하도록 설계됐다. 오랫동안 과도하게 분비되면 사달이 난다.

문제는 현대사회에서 이러한 스트레스가 사회적으로 일상화하고 있다는 사실. 차별, 빈곤, 과중하고 장기간에 걸친 노동과 가사 활동 등으로 스트레스를 받은 인간의 몸에는 이러한 호르몬이 만성적으로 과다 분비된다. 그 결과 고혈압과 심혈관질환으로 쉽게 이어진다. 스트레스 호르몬의 과다분비는 유산의 원인이 될 수 있는 것은 물론, 산모가 태아에게 쓸 영양분을 다른 곳에 쓰도록 함으로써 저체중아 출산으로 이어질 수 있다.

소외계층은 이러한 사회적 스트레스를 정면으로 받는 반면, 중산층‧상류층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러한 스트레스를 비교적 쉽게 해소할 수 있다. 계층별 건강 격차의 원인이다. 지은이의 연구 결과 이러한 건강 격차는 개인의 노력으로 소외계층이 전문직 고소득자로 신분상승을 하더라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지은이의 40년 간에 걸친 연구 결과는 건강과 수명이 인체와 개인 문제를 넘어 사회 시스템 문제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시켜준다. 보건의료와 복지 정책에 출산정책까지 이에 맞춰 조정할 필요가 있음을 웅변한다. 원제 Weathering: The Extraordinary Stress of Ordinary Life in an Unjust Socie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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