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년 11월 삼성문화재단 리움미술관 보존연구실 연구원들은 미국의 한 박물관으로부터 조선시대 8폭 병풍을 전달 받았다. 200년 가까이 방치된 결과 군데군데 구멍이 나고 색이 바랜 그림이 붙어있었다. 지역이 조선시대 평양인 것은 알겠는데 무슨 내용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우선 ‘평양성도’라고 이름을 붙이고 보존 처리에 들어갔다. 병풍에는 평안감사 외에 다른 주인공으로 판단되는 2명이 계속 반복해서 나왔다. 이들은 누구일까.
연구원들은 연구 논문들을 뒤져서 이들이 ‘평안도 도과(道科)’에 급제한 문·무과 장원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도과’는 조선시대 각 도 단위에서 진행된 지역 과거시험이다. 도과 급제자가 주인공임을 알아내자 이들을 평안감사가 환영하는 내용임이 밝혀졌다. 그리고 처음 뒤죽박죽이었던 8폭의 순서가 제대로 정리됐다. 병풍에는 ‘평안감사도과급제자환영도’라는 이름이 붙었다. 모두 1년 4개월의 지난한 과정이었다. 보존 처리를 마친 이 그림은 ‘보물급’ 수준의 가치를 지녔다는 평가를 받는다.
국외소재문화재단은 삼성문화재단·단국대와 함께 미국 매사추세츠주 피보디에식스박물관이 소장한 ‘평양감사도과급제환영도’ 8폭 병풍과 조선시대 ‘활옷’의 보전 처리 작업을 마치고 11일부터 리움미술관에서 일반에 공개한다고 10일 밝혔다.


우선 ‘평양감사도과급제자환영도’ 병풍은 일종의 기록화다. 조선 순조 때인 1826년 평안감사가 평안도 도과 급제자를 축하해 베푸는 연회를 그린 병풍 그림으로 폭과 높이는 전체가 5.07×1.70m, 각 화면은 0.58×1.28m다. 도과 급제자 일행이 배를 타러 이동하는 순간부터 평양성의 동쪽 부벽루에서 벌인 연향(잔치), 환영 행사의 ‘정점’이었던 야간 뱃놀이 등을 화면에 담았다.
원래 병풍은 분리된 낱장 상태였고 손상되거나 훼손된 부분도 상당했다. 리움미술관 측은 그림을 가능한 온전한 모습으로 되돌리는 데 집중했다. 미술관 소속 보존 처리 전문가들은 오래된 안료가 떨어지지 않도록 처리하고 그림 뒤에 덧대진 오래되고 산화된 배접지를 제거했다. 연구·조사를 토대로 병풍 틀을 제작해 복원했다.

이 병풍이 우리나라를 떠난 경위는 불분명하다. 피보디에식스박물관의 기록에 따르면 박물관 측은 이를 1927년 일본 브로커를 통해 구입했다. 병풍에는 1924년의 일이 적혀 있어 일제강점기인 1924~1927년 사이 국내에서 병풍으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림이 그려진 것은 행사가 개최된 1826년 직후일 테다.
국외재단은 2013년부터 나라 밖 문화유산 보존·복원 및 활용 지원 사업을 추진해 왔다. 현재까지 10개국 30개 기관을 대상으로 58건의 사업을 지원했다. 삼성문화재단과는 2022년 9월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국외에 있는 한국 문화유산의 체계적인 보존을 위해 기술 지원을 약속받았다. 이 병풍이 첫 결실인 셈이다. 국외재단 측은 “국내 사립 미술관이 나라 밖 문화유산 보존을 지원한 첫 사례”라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피보디에식스박물관이 소장한 18~19세기 ‘활옷’도 이번에 국내 전문가의 손을 거쳐 되살아났다. ‘활옷’은 조선시대 여성들이 입던 결혼 예복으로 지금의 웨딩드레스다. 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의 도움으로 보존 처리된 이 활옷은 붉은 비단 위에 봉황·꽃 등 다양한 문양을 수놓고 금박으로 장식해 상당한 지위를 가진 여성이 착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역시 1927년 일본 브로커 회사를 통해 박물관이 구입한 것으로 기록이 남아 있다.
병풍 보존 처리는 삼성문화재단이 자금과 기술을 모두 제공했다. 활옷은 국외재단이 자금을, 단국대가 기술을 각각 부담했다. 리움미술관은 두 문화유산을 11일부터 4월 6일까지 일반에 공개한다. 이후 미국으로 되돌아가 피보디에식스박물관이 5월에 재개관하는 ‘한국실’의 주요 작품이 될 전망이다.

김정희 국외재단 이사장은 “국외에 있는 우리 문화유산이 보다 온전히 보존되고 현지에서 널리 소개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류문형 삼성문화재단 대표는 “고(故) 이건희 선대회장이 1989년에 국내 사립 미술관 최초로 보존연구실을 설치한 이후 보존·복원 기술을 축적해 왔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