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양간도와 북간도, 그 사이

2025-03-21

양간도(洋間島). 소설 〈광장〉의 작가 최인훈 선생은 미국의 교포사회를 일러 ‘양간도’라고 불렀다. 북간도에 비유한 표현이다. 여러 가지로 음미하고 생각해볼 여지가 많은 그럴듯한 비유다.

양간도라는 말은 ‘미국과 한국 사이에 어정쩡하게 떠 있는 섬’ 정도의 뜻이겠다. 최인훈 작가는 이 말을 미주 한인사회를 낮잡아보는 투로 사용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꼭 부정적으로만 해석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나는 개인적으로 북간도에서 태어나서 양간도에서 살고 있는 중생인지라, 두 이름 사이의 상징적 의미를 비교해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간도(間島)는 글자 그대로 ‘사잇섬’이다. 사전의 설명을 빌리면, 간도는 압록강 상류와 두만강 북쪽의 조선인 거주 지역을 일컫는 말로, 일반적으로 간도라 하면 현재의 연변 조선족 자치주 지역을 가리키며, 두만강 북쪽인 연변 지역을 ‘북간도’, 그 서쪽인 압록강 북쪽 지역을 ‘서간도’라 부르기도 한다.

널리 알려진 대로, 북간도는 일제강점기 조국 독립운동의 중요한 거점이자 온상이었다. 많은 독립투사들이 이곳에서 힘을 얻었고, 후원을 받았다. 예를 들어, ‘일송정 푸른 솔은…’으로 시작되는 가곡 〈선구자〉는 만주(특히 북간도)에서 항일운동을 하던 독립군을 묘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란강, 용두레 우물가, 용문교, 용주사, 비암산… 이 노래의 원래 제목은 〈용정의 노래〉였다.

그 밖에도 봉오동 전투, 청산리 대첩, 15만원 탈취사건, 신흥무관학교 등… 북간도는 종교와 파벌을 넘어선 대단결을 이루어낸 터전이었다.

또한, 간도는 우리 현대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많은 인재를 길러낸 곳이기도 하다. 악랄한 일제 치하에서 신음하던 조선과는 달리 일찍이 개화된 이곳에는 명동학교, 은진중학교, 대성중학교, 명신여중학교, 광명중학교 등 여러 곳의 학교와 교회가 세워져, 서양 선교사들이 들여온 근대식 교육으로 많은 인재를 길러냈다. 그 중심에 정신적 지도자 김약연 목사가 있었다.

‘별의 시인’ 윤동주를 비롯하여, 문익환 목사, 독립투사 송몽규, 영화 〈아리랑〉의 나운규 감독 등이 여기서 공부했다. 강원룡 목사, 모윤숙 시인, 강경애 소설가 등도 이곳 출신이다. 잠시 거쳐간 이는 훨씬 더 많다.

연변 조선족 사람들은 이곳의 우리 이민문화사를 산업으로 만들고, 문화테마 관광지로 개발하고 있다. 명동촌과 용정 일대에 윤동주 생가와 명동교회. 명동소학교 등이 복원되어 있고, 윤동주 기념관, 연변조선족박물관도 지었다.

이에 비해, 태평양 건너 양간도 주민인 우리들에게는 그 옛날 북간도에서와 같은 절박감도 없고, 어쩔 수 없이 제 나라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피맺힌 안쓰러움이나 허망함도 없다. 잘 먹고 잘살아보겠다고 제 발로 걸어온 땅이니 서러움을 마음껏 드러낼 수도 없다.

지금 우리에게는 북간도에서처럼 독립운동이나 조국광복 같은 뚜렷한 목표도 없다. 물론 미국에서도 초기 이민의 경우에는 조국 독립이라는 커다란 구심점이 있었다. 그것을 향해 하나로 뭉칠 수 있었고, 피땀 흘려 번 돈을 아낌없이 나라에 바치는 것을 당연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뜨거움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그런 뜨거운 구심점도 공동체 의식, 공동의 목표도 없다. 오로지 개인적 행복 챙기기에 바쁘다. 그래서 지금은 얼음짱 세상이다. 차디찬 땅 위에서 무슨 나무 한 그루인들 제대로 키우랴.

이민은 오늘날 유일하게 남아있는 합법적인 영토확장이라고 일컬어진다. 그러나, 영토확장을 위해서는 마음을 열어 현실을 똑바로 파악하는 눈이 필요하다. 그 위에 우리 나름의 문화전통을 세워야 비로소 우리의 삶이 넓어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복잡한 마음으로 광복 80주년을 맞는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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