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단기술 인력, 성과 보상 전제한 유연한 근로시간제 적합

2025-02-02

반도체특별법의 ‘주52시간 예외 조항’ 어떻게 봐야 하나

근로시간제도는 우리가 일하는 방식을 결정한다. 1일 8시간, 1주일 40시간이라는 규정은 노동의 규범을 만들었다. 따라서 근로시간제도는 기술의 변화에 따라 시의적절하게 변해야 한다. 시대에 맞지 않는 근로시간제도는 일의 효율성을 떨어뜨리고 나아가 혁신을 방해할 수 있다. 비대면 회의 기술이 5년 전에 비해 비약적으로 발전했는데 근로기준법이 물리적 사무공간을 전제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기술 발전이 가속화하고 경쟁이 치열해지는 지금 근로시간제도의 개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는 이유이다.

우리나라의 근로시간제도는 지난 수십 년 동안 경제·경영·법 등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로부터 너무 경직적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그렇지만 그러한 비판이 무색하게도 우리의 근로시간제도는 그동안 근본적으로 바뀐 것이 없고 최근에는 오히려 주52시간제라는 경직성에 경직성을 더하는 정책까지 덧붙여져 있는 실정이다.

주 단위 합산하는 주52시간 제도

선진국에 없는 경직적 총량 규제

성과 위주로 업무평가 관행 정착

전문직 근로시간 제약없는 미·일

첨단산업 국가 경쟁력 확보 위해

업무 시간 산정 단위 다양화해야

대다수 경제학자는 주52시간제의 운용상 경직성을 비판하고 있다. 한국경제학회는 2020년부터 역대 경제학술상 수상자와 학술지 편집위원, 전임학회장 등 전문가로 구성된 패널을 대상으로 경제 현안에 대한 의견을 수렴하는 설문조사를 하고 있는데, 2023년 5월의 주제가 주52시간제였다. 조사 결과를 보면 응답자 중 89%가 업종과 직무, 경기 상황에 따라 예외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주52시간제를 유연하게 개정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피력한 바 있다. 제도 운용의 경직성을 꼬집은 것이다.

그렇다면 주52시간제는 왜 경직적인 것인가. 우리나라의 주52시간제는 근로시간을 주(週) 단위로 합산해, 합산한 근로시간이 52시간을 넘어서면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예를 들어 지난주에 48시간 일하고 이번 주에 56시간을 일하면 불법이 된다. 이렇게 일주일마다 매주 근로시간을 개별적으로 합산해 총량을 규제하는 나라는 최소한 선진국 중에는 없다. 독일의 경우 1일 근로시간이 8시간을 초과해서는 안 된다고 정하고 있지만, 6개월 혹은 24주 1일 평균 8시간이 기준이다. 즉, 우리나라처럼 1주일 단위로 근로시간을 규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일본은 2018년부터 연장근로시간 총량의 상한을 두기 시작했지만 상한을 월 45시간, 연 360시간으로만 정하고 주 단위로 제한은 두고 있지 않다. 게다가 노사가 합의하면 확대도 가능하다. 반면 우리나라는 근로시간이 합법인지 불법인지를 매주 따져야 하고 불법인 경우 형사처벌 대상이 된다.

미국, 초과근로 총량 법적 제약 없어

미국의 경우에는 아예 초과 근로의 총량에 대한 법적 제약이 없다. 그뿐만 아니라 미국은 우리나라와 같이 초과 근로에 대해 150%의 수당을 지급해야 한다는 법이 있지만 이른바 ‘화이트칼라 이그젬션’(white collar exemption)이라는 제도를 통해 고소득 전문직과 사무직에 대해서는 이를 면제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가까운 일본의 경우도 비슷한 제도가 있다. 일본은 ‘고도프로페셔널’ 제도를 통해 연구개발 등 전문적인 업무에 종사하는 고소득 근로자에 대해서 초과근로시간에 대한 규제를 면제해 주고 있다.

미국과 일본에서 전문직 근로자의 근로시간을 엄격하게 규제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직 근로자의 경우 근로시간을 규제하는 것이 무의미하고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전문직 종사자에게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창의적 사고는 언제 어디에서 나올지 모른다. 고대 그리스의 학자이자 발명가였던 아르키메데스는 목욕탕에서 욕조의 물이 흘러넘치는 것을 보고 물체의 부피를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을 깨달았다고 한다. 창의적 업무에 있어서는 일의 시간과 공간은 의미가 없고 근로와 여가의 경계선이 모호하다. 언제 어디서 “유레카”(내가 알아냈다)를 외치게 될지 모른다는 말이다.

이처럼 연구개발 인력의 근로시간을 측정하는 것이 어렵기도 하지만 기업의 입장에서 보면 굳이 애를 써서 측정하고 감시하고자 하는 유인도 없다. 이들의 업무 성과가 근로시간과 상관성이 낮기 때문이다.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책상에 앉아 있었던 시간과 같은 소위 ‘엉덩이 고과’는 이들의 성과를 보여주는 척도가 전혀 아니다. 오히려 일 잘하는 직원의 근로시간이 더 짧은 것이 당연하다. 성과 위주로 평가해야 한다면 일하는 방식은 자유롭게 재량에 맡겨도 된다. 느리지만 꼼꼼하게 결국은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내는 사원이 있다면 그러한 기여도 제대로 평가받고 보상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전문직 근로시간 규제는 무의미

최근 ‘반도체특별법’을 통해 사회적 논의가 되고 있듯이 최소한 글로벌 경쟁의 중심에 있는 첨단산업의 기술개발 인력에 한해서라도 주52시간제의 운용을 유연하게 할 필요가 있다. 이들 고숙련 고급 기술개발 인력에 대해서 단순 반복적 업무를 수행하는 근로자와는 전혀 다른 근로시간 제도와 보상 방식을 적용하는 것이 공정하다. 이들에게는 근로시간보다는 성과에 따른 보상을 전제로 한 유연하고 재량과 선택의 폭이 큰 근로시간 제도가 적합하다. 혁신적 아이디어와 발상의 전환이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구글이 왜 자신의 사업장을 ‘캠퍼스’라고 부르고 카페와 수영장을 두고 있는지, 왜 직원의 자율성을 극대화하는 일하는 방식을 선택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모든 정책과 제도에는 장단점이 있다. 그런데 첨단산업의 기술개발 인력에 대한 주52시간제의 유연화는 단점보다는 장점이 많다. 우선 주52시간제를 유연화하더라도 주52시간제의 근원적 목적인 근로시간 단축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 앞서 지적했듯이 주52시간제의 경직성의 핵심은 일주일 산정 단위에 있다. 따라서 산정 단위를 다양화하는 방식으로 유연화를 하게 되면 1년 근로시간 총량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

주52시간 유연화, 총량에는 영향 없어

또한 기술개발 인력이 전체 노동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그렇게 크지 않다. 2022년 통계에 따르면 기업체에 속하는 과학기술 인력은 약 40만명 정도라고 한다. 이 중에서 첨단분야의 신기술 및 신제품 개발을 선도하는 핵심 인력을 5%라고 어림하면 대략 2만명 정도로 추산된다. 게다가 이들이 항상 장시간 근로를 하는 것도 아니다. 고용노동부의 고용형태별 근로실태 조사 원자료에 따르면 주52시간제가 도입되기 전인 2017년 기준 포괄적으로 대졸 이상 학력 근로자 전체로 보더라도 주52시간을 초과해서 일하는 비중은 3.6% 수준이었다.

고급 기술개발 인력은 저숙련근로자에 비해 건강권과 시간 선택권이 최소한의 수준 이상으로 보장될 수 있는 제도적 환경에 있어 사용자의 일방적인 결정에 의해 불이익을 볼 위험이 낮다. 그러나 당연히 제도를 악용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문제가 있는 소지에 대해서는 정부가 선제적으로 나서야 한다. 야간근로나 휴일근로처럼 위험성이 높은 경우는 최대한도를 둘 필요가 있다. 사내병원과 휴게실과 같은 건강관리 인프라를 내실화하고 근로자 자신의 신중한 선택과 직속 상관의 엄격한 관리가 이뤄질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할 것이다.

필요한 경우 정부의 지원도 해야 한다. 이들은 글로벌 경쟁에 출전하는 우리나라의 국가대표이기 때문이다. 이들 핵심인력은 믿을 것이라고는 인적자원밖에 없는 우리나라의 성장 원동력이다. 10년 후 우리의 자녀가 성인이 되었을 때 그들의 생활 수준은 지금 진행되는 글로벌 경쟁의 결과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긍정적 외부성으로 국가의 적극적인 지원은 정당화될 수 있다.

줄어드는 근로시간, 유연화는 필수

주52시간제의 유연화가 근로시간 단축 기조의 역행이라고 우려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우리보다 유연한 근로시간제가 있는 미국과 독일, 일본의 근로시간이 우리나라보다 짧은 점을 생각하면 단순히 근로시간 제도를 엄격히 유지하는 것이 근로시간을 단축하는 필수요건은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근로시간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지속해서 감소해 왔다. 근로시간은 여전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다른 국가에 비하면 길지만 절대적 감소 폭이나 속도로 보자면 가장 빠르게 근로시간이 줄어드는 나라다.  근로시간의 감소 추세는 소득이 상승하면서 여가의 가치가 올라가고 생산성이 향상되면서 근로시간에 대한 수요가 하락함에 따라 나타나는 결과로서 다른 선진국에서도 역사적으로 관측된 추세다. 선진국의 사례를 보면 앞으로도 이러한 추세는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근로시간이 짧아지면 짧은 근로시간을 더욱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필요하고 이때 유연한 근로시간 제도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얼마 전 중국의 한 업체에서 개발한 인간형 로봇, 일명 휴머노이드가 중국 어느 도시의 북적이는 시내 거리를 활보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로봇뿐만 아니라 자율주행차와 인공지능(AI) 등 소위 4차 산업혁명의 첨단산업 분야에서 중국의 성장세가 무섭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다론 아제모을루 MIT 교수는 우리나라가 고령화·저출산, 취약한 내수, 중국과 경쟁이라는 3대 구조적 문제에 봉착해 있고 이에 대한 돌파구를 첨단산업에서 찾아야 한다고 조언한 바 있다. 가야 할 길도 알고 갈 길이 바쁜데 실천이 따르지 않고 있다. 미세먼지로 뿌연 하늘처럼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시계 제로의 정치가 발목을 잡아 시대에 맞지 않는 구태의 법 제도는 개혁될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답답하다.

이정민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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