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공감] 내 방엔 시계가 없어서

2025-01-16

연초, 새해가 밝았으니 나도 계획이란 걸 세워보고자 노트북 앞에 앉았다. 유튜브를 끄고 이불을 정리하고 테이블에 앉았다가 핸드폰을 열어 괜히 기사 한, 두 개를 터치해 보았다. 무슨 사건, 사고가 그리 많은지. 보기만 해도 속이 시끄럽다. 시선을 바닥으로 향했더니 머리카락들이 눈에 들어왔다. 잠시 일어나 돌돌이로 바닥을 스윽 밀었다. 동그랗게 먼지들이 말려 붙은 쾌감에 흐믓해하고는, 그래도 세상 돌아가는 건 알아야 할 것 같아 뉴스 기사 서, 너 개를 대충 훑었다. 이내 마음이 불편해 핸드폰을 뒤집어 두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올해의 해가 떴지만, 뉴스 속 세상은 여전히다. 노트북 앞에서 손목으로 턱을 괴고 다시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참, 도통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커피 한 모금 홀짝, 지금까지 무계획으로 살던 사람이 새해가 된다고 해서 근사한 계획이 세워질 리 만무하다. 그래, 지난해나 올해나 나는 그저 나일 뿐이니까.

나는 참 계획을 못 세운다. 계획표는 무슨, 메모도 잘 못한다. 강의를 듣고 중요한 내용을 열심히 메모했는데, 나중에 메모장을 꺼내 보면 초등학생의 낙서 정도가 적혀 있을 뿐이다. 중, 고등학교 때 열심히 쓰고 꾸민 다이어리를 지금 생각해 보니 메모와 정리를 좋아했던 게 아니라, 그저 딴짓을 잘했던 것 같다. 그 시절, 공부는 하기 싫고 시간은 남아돌았고, 예쁜 색깔의 펜으로 정성스럽게 몰입했다. 친구와의 기억을 되짚고, 그림을 그리고, 진심을 다해 편지를 썼고, 그때는 순수함이란 능력치가 있었다. 자본주의에 찌든 지금은 그런 해맑은 능력을 상실한 지 아주 오래고. 잘 세운 계획은 어쩐지 규칙, 그러니까 정해진 룰, 시스템 같다. 그래도 새해니까, 새해 계획을 세워두면 제법 근사해 보이니까 남들처럼 계획을 세워보려고 골똘해 보았지만, 나는 금방 산만해졌다. 계획을 약속처럼 다룰 수 있다면, 좀 더 다정히 일상에 스며들 수 있지 않을까.

팔을 주욱 뻗어 엎드린 채 방안을 둘러보는데 내 방에는 시계가 없었다. 웃겼다. 집에서는 무조건 쉬자 주의라, 외출 후 집에 와서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 사람처럼 산다. 낮과 밤, 배고플 때, 화장실 가고 싶을 때, 졸릴 때 정도, 몸의 본능 시계대로 움직일 뿐이다. 쉴 때는 시계도 잘 보지 않으면서 1년 치의 시간을 계산해서 계획을 세우고 있다니. 방안에 시계가 없다는 걸 깨닫고 나서, 나답지 않게 억지로 붙들고 있는 새해 계획의 이면이 보였다. 남들이 하니까, 새해니까, 계획이라도 있으면 생각 없이 살지 않는다는 걸 증명할 수 있지 않나. 할지, 하지 않을지, 포기할지, 계속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그래도 해야 할 일이 있어야 불안하지 않고 마음의 안도를 느낄 수 있다. 가만히 있으면 뒤처진다 여겨서, 가만히 있는 걸 하지 못해서 뭐라도 하는 기분, 계획은 있다는 걸 보여줘야 존재감을 나타낼 수 있어서 다들 그렇게 바쁘게 사는 건 아닌가.

자기 홍보 자기 PR 시대, 나 자신을 계획하고 홍보하여 나를 상품화하는 시대다. 1인 기업인 나를 상품처럼 굴려 최대 이익을 산출해야 한다면, 매출 계획을 세워 연말에 그에 걸맞는 달성률을 책정해야 한다면, 언제 재미있고 언제 즐기고, 그래서 언제 행복하냔 말이야. 생각해 보니 더 우습다. 신혼여행도 계획하기 싫어서 패키지 그대로 움직였다. 무계획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만난 낯선 도시는 아직까지 가장 대수롭고 소담한 장면으로 기억되어 있고. 계획보다 더 중한 것이 있다. 지금, 여기, 그리고 나의 기분. 그 무엇보다 나의 기분이 나 자신을, 나의 안녕을 증명해 준다. 계획대로 착착 실적을 쌓는 인생보다 가끔은 어디에 가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내가 좋다. 빠듯하게 계획 세운 엑셀 파일보다 뒷짐을 지고 바깥으로 나가 차가운 공기를 마시며 공원을 걷는 게 더 필요하지 않을까.

사실 이불 속이 가장 안전하긴 하지만.

김현주 울산 청년 작가 커뮤니티 W 자문위원

[저작권자ⓒ 울산저널i.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Menu

Kollo 를 통해 내 지역 속보, 범죄 뉴스, 비즈니스 뉴스, 스포츠 업데이트 및 한국 헤드라인을 휴대폰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