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긁?’이라는 인터넷 용어가 있다.
상대에게 시비를 건 뒤 ‘긁?’이라고 묻는다. ‘긁혔냐’는 질문으로, 속되게 표현하면 ‘빡쳤냐’는 의미다. 국어사전에선 ‘긁다’를 ‘손톱이나 뾰족한 기구로 바닥이나 거죽을 문지르다’라고 정의한다. 뾰족한 무언가는 묘하게 어딘가 아프다. ‘긁’이 감정적 도발과 상처를 묘사하는 용어로 자리 잡은 이유일 테다. 긁히면 인정하기 싫어도 서서히 분노가 차오른다.

비상계엄이 선포된 지난해 12월3일 오후 11시부터 탄핵이 선고된 4월4일 오전 11시까지 123일 동안 집회 현장을 취재했다. 진영을 막론하고 다수의 집회 현장에선 ‘긁는’ 발언과 행동이 빠지지 않았다. 탄핵 찬성 측에선 윤석열 전 대통령 지지자들을 향해 “어차피 탄핵될 건데 XX들”이라며 힐난했고, 반대 측에선 아예 ‘좌파 조롱단길 함께 걷기 대회’를 열었다.
1910년대 일본을 배경으로 한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 ‘봄눈’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행위로서의 전쟁이 끝난 대신 이젠 감정의 전쟁을 치르는 시대가 시작됐다. 둔감한 놈들은 보이지 않는 이 전쟁을 전혀 느낄 수 없을 테고, 그런 게 있다는 것조차 믿으려 들지 않을 거다.” 돌이켜보면, 123일간의 탄핵 정국에서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의 전쟁터에서 긁고 긁히며 살았다.
‘봄눈’은 초기 다이쇼 시대의 이야기다. 메이지유신 이후 급속한 근대화와 서양의 영향을 경험하고 있던 때다. 불안정한 사회와 함께 개인의 정체성은 흔들렸다. 이런 혼란 속에서 등장인물들은 감정적 우위를 점하려 애썼다. 신분과 성별에 상관없이 모두가 그랬다. 급변하는 세상에서 기댈 곳을 잃은 이들이 마지막으로 붙잡은 것은 감정적 우위였다.
길어진 탄핵심판 과정에서도 그랬다.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사람들은 감정적 반응을 통해 안정감을 찾으려 했다. ‘누가 더 옳은가’보다 ‘누가 더 감정적으로 우위에 있는가’가 중요해졌다. 그럴수록 집회 현장에서 이념적 구호는 듣기 힘들었다. 감정의 전쟁에서 상대방은 단순한 정치적 반대자가 아닌,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는 존재로 타자화됐다. 서로를 ‘개념 없는 극우’와 ‘친북 좌파’로 규정하고 감정적으로 배제했다.
문제는 “행위의 전쟁과 마찬가지로 감정의 전장에서도 역시 젊은이들이 전사해 간다”는 점이다. 여기서 젊은이는 현재의 우리이자 미래의 세대를 의미한다. 우리는 이미 이 감정의 전쟁터에서 너무 많은 희생자를 냈다. 서울서부지법 난동 사태가 대표적이다. 지난 1월19일 오전 2시59분 현직 대통령이 헌정사상 처음으로 구속되자 영장실질심사가 이뤄진 서부지법 주변에서 불법 시위를 벌이던 수백명의 지지자들이 법원을 습격하고 점거해 시설을 부수고 경찰과 민간인, 기자를 상대로 무차별 폭력을 휘두르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동영상에 비친 일단의 군중은 이성을 잃고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행동하는 것 같았다. 수십명의 청년들이 구속되며 사태는 일단락됐지만, 그 상흔은 법원 안팎에서 여전하다. ‘봄눈’의 주인공 기요아키가 사토코를 향한 감정적 집착 끝에 비극적 결말을 맞이했듯, 감정의 전쟁은 결국 자기파괴로 이어진다. 감정의 전쟁터에서 서로를 긁으며 남긴 상처는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이예림 사회부 기자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