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 일산 킨텍스에서 열린 월드 스마트시티 엑스포(WSCE). 행사장을 둘러보던 김정빈 수퍼빈 대표는 현장에 출품된 A사의 기계를 발견하고는 두 눈을 의심했다. 몸체의 구조 뿐만 아니라 파란 바탕에 생수병 모양으로 그려진 일러스트까지 자사의 ‘네프론’과 꼭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의 개발 사례를 외부에 소개하기 위한 발표자로 행사에 참석한 일정이어서 배신감은 더욱 컸다.
그가 인공지능(AI)에 기반한 재활용 쓰레기 회수 로봇 네프론으로 2015년 사업을 시작한 지 8년 만에 처음으로 카피캣을 마주했던 순간이었다. 그러나 끝이 아니었다. A사 외에도 네프론의 모습을 좌우로 반전시켜놓은 듯 노골적인 모방품들이 우후죽순으로 등장했다. 김 대표는 “경쟁사 제품을 고쳐달라는 이용자들의 민원 전화가 우리 회사에 걸려올 정도로 외관이 유사했다”고 토로했다.
경쟁사에 의해 기술이나 디자인 등을 침해당했다며 특허청에 분쟁 조정을 신청한 기업이 지난해 역대 최대 수준을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혁신 아이디어를 모방해 유사한 제품이나 서비스를 내놓는 ‘카피캣’의 난립이 어느 때보다도 심각해진 셈이다.
산업재산권 분쟁 역대 최대치
스타트업 포함된 中企가 80%
상표·디자인 관련이 가장 심각
정부 지원사업은 오히려 축소

7일 특허청에 따르면 지난해 산업재산권과 관련한 분쟁 조정 신청 건수는 160건으로 집계돼 2019년 45건 이후 5년 만에 3.5배 이상 폭증했다. 이는 1995년 산업재산권 분쟁조정위원회 설립 이후 최대치다. 2022년(76건) 대비 2배 이상 뛰어오른 2023년(159건)의 추세가 그대로 이어진 셈이다.
작년 분쟁 조정을 신청한 주체 중 스타트업을 포함한 중소기업은 122건으로 전체의 76.3%를 차지했다. 개별 신청 사례를 보면 상표·디자인 관련이 65.6%로 가장 심각했다. 여기에는 실물 상품과 온라인 플랫폼에서의 사용자 인터페이스(UI) 등 도용이 모두 포함된다. 나머지 34.4%는 특허·실용신안·부정경쟁행위·영업비밀 관련 분쟁이었다.
이런 가운데 기술과 디자인 침해로부터 특히 취약한 중소기업을 보호할 정부 지원책은 오히려 집행 금액이 줄어들었다. 지난해 중소벤처기업부 기술보호 지원사업은 95억원이 집행돼 2023년 104억원 대비 8.4% 가량 규모가 감소했다.
"여론전이 유일한 대응수단"
플랫폼 DB·UX 도용 부지기수

창업자들 사이에서는 피해 사례를 캡처한 뒤 여론전을 펼치는 방법이 사실상 유일한 대응 수단으로 꼽힌다. 공들여 개발한 기기나 UI(사용자 인터페이스)를 감쪽같이 도용당하는 것은 물론 수년 간 관리해온 영업용 데이터베이스(DB)를 탈취당하는 경우도 상당수다. 서울경제신문과 인터뷰한 4명의 스타트업 창업자들은 “경쟁 기업이 사업 기반을 베껴 가는 피해를 입어도 구제 방법이 사실상 없는 셈이어서 시장에서의 우위를 잃거나 심지어는 생존까지 위협받는 상황”이라고 입을 모았다.
온라인 플랫폼들끼리 벌어지는 UI나 UX(사용자 경험) 도용은 더욱 속수무책이다. ‘부동산플래닛’이 대표적이다. 이 스타트업은 지난달 글로벌 기업 쿠시먼앤드웨이크필드가 자사 딜정보 홈페이지 디자인을 따라한 뒤 논란이 일자 이를 수정했다고 주장한다. 정수민 부동산플래닛 대표는 “UI에 저작권이 인정되는 사례는 극히 드물고 손해를 입증하기도 쉽지 않다”면서 “설령 승소하더라도 기획 및 디자인에 투입된 각종 비용에 비해 부과될 배상액은 훨씬 낮다”고 했다. 반면 쿠시먼 측은 “부동산플래닛과 유사한 인터페이스로는 하루도 영업한 사실이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피해는 스타트업의 규모가 작을수록 치명적이다. 한인 민박 위주인 숙박 플랫폼 ‘민다’는 경쟁 업체 마이리얼트립이 직원들을 동원해 입점 업소 데이터베이스를 탈취했다고 주장하며 소송전을 벌이는 중이다. 자체 추산한 거래액 피해는 연간 기준 약 250억 원에 달한다. 김윤희 민다 대표는 “직원 수로 치면 우리는 마이리얼트립의 1% 수준”이라며 “소송 탓에 비용이 많이 들고 시간도 다 뺏겨 아무 일도 못할 정도지만 ‘이래서 망하나 저래서 망하나’ 하는 생각에 결국 변호사를 선임했다”고 말했다. 김정빈 수퍼빈 대표는 “카피캣들도 스타트업이 지난한 소송 과정을 감당할 비용과 시간적 여력이 없다는 점을 알고 노리는 것”이라고 했다.
스타트업 창업자들은 후발 주자가 선도 기업을 거리낌 없이 모방하는 행태가 업계에 관행처럼 자리 잡았다고 호소한다. 선도 기업의 아이디어를 참조할 수는 있지만 베끼기가 마치 ‘모범 답안’처럼 굳어졌다는 얘기다. 서정훈 카카오스타일 대표는 “산업에 큰 반향을 일으킬만한 아이디어가 나왔는데 이를 너무 보수적으로 보호한다면 생태계가 위축되는 문제가 있다는 인식이 과거부터 창업자들 사이에 퍼져 있다”고 했다.
방치 시 “혁신·투자 위축” 우려
제도 보완 외 자정작용도 필수
전문가들은 이처럼 스타트업이 사업 아이디어나 기반을 빼앗기는 현상이 지속될 경우 창업자들의 의욕이 꺾이는 것은 물론 산업 전반의 혁신 속도가 늦춰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이정희 중앙대 경제학부 교수는 “스타트업이 건강한 경쟁을 통해 투자를 유치하고 성장해 나가는 사례가 계속 나와야 우리 산업의 미래 경쟁력이 생긴다”며 “지적재산권 문제에 정부가 정책 의지를 가지고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않으면 가뜩이나 얼어붙은 투자가 더욱 위축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제도적 보완뿐만 아니라 업계 내부의 자정 작용을 강조하는 목소리도 높다. 홍기용 인천대 경영학과 교수는 “스타트업들도 표절이나 ‘인력 빼오기’ 등이 세간에 알려지면 기업의 존망에까지 영향이 미친다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지용 상명대 경영학부 교수도 “기업 경영에서 상도를 더욱 중요하게 여기는 문화가 확산돼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