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애 수필가
일렁이는 물결마다 볕 꽃이 피어난다. 한 다발의 이삭이 분수같다. 원기둥 모양의 자주색 수염이 햇살에 반짝인다.
볼을 대니 까슬까슬하다. 수크령 너머 황금색 가을 들녘이 펼쳐진다.
수크령은 수백 마리 이리가 일제히 꼬리를 흔드는 것 같아 랑미초라고 한다.
건조한 땅은 물론 습지에도 잘 자란다.
산비탈이나 밭 덤불, 길가 어떤 곳이든 가리지 않는다 해 길갱이라고도 한다. 아무리 밟혀도 끄떡없을 만큼 생명력이 질겨 땅 유실을 막는데 긴요하다.
윤 씨 네 낮은 삽작구레엔 퇴비포대가 어른 키 높이보다 높게 쌓여있다.
저 많은 거름 포를 아주머니 혼자 등짐으로 져 나르자면 굽은 허리가 땅에 붙어버리지 않을까 싶다. 작은 체구에 피부가 유난히 가무잡잡한 아주머니는 마을 토박이다.
첫애 두 돌 무렵까지 서울에서 살았다. 아저씨는 건설현장에서 일하고 아주머니는 함바를 열었다. 무럭무럭 자라는 아기와 성실한 남편, 더 바랄 게 없었다. 아저씨는 종일 벽돌과 모래 등 짐을 져 나르는 것을 감당하기엔 태생적으로 약골이었다. 이년 여의 타향 생활을 접고 귀향했다.
훤칠한 키에 외모가 준수했던 윤 씨는 낙향 후 아내를 에돌았다. 맏아들이 지적 장애 판정을 받은 후부터는 술로 세월을 보냈다. 아주머니는 마흔 넘은 허약한 아들과 겨릿소처럼 삼천 평 배 농사와 논 밭농사를 감당하고 있다.
그니는 마흔 줄에 중풍으로 한번 쓰러진 후, 불편한 몸으로 배 적과와 봉지 씌우는 일을 하다 사다리에서 여러 번 떨어졌다. 심하게 다친 그해 완치되지 않은 다리는 영영 안짱다리로 굳었다.
결초보은 고사는 수크령에서 유래되었다.
춘추전국시대 진나라 위과는 아버지 유언을 어기고 서모를 개가시켜 순장을 면하게 했다.
그 보답으로 서모의 아버지는 수크령을 비끄러매어 그에게 적장을 사로잡게 했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아주머니는 전생에 아저씨에게 무슨 큰 은혜를 입었던 것일까.
아침이면 아저씨의 경운기 뒷 칸에 몇 개의 장 보퉁이와 함께 인근 시장통으로 간다.
아들이 입던 것 같은 빛바랜 붉은 티셔츠가 그녀의 왜소한 몸을 겉돈다.
검붉게 부어오른 손은 티셔츠 색깔과 비슷하다. 보퉁이엔 잘 익은 배와 채 전에서 거둔 부추, 청둥호박 등속이 올망졸망 누워있다.
아라리 가락처럼 생의 가파른 재를 넘고 거센 물을 건넜던 아주머니는 노동만이 버팀목임을 진즉에 터득했는지 모른다.
무거운 함지박을 이고 과수원을 오르내리는 모습엔 힘이 넘친다. 오달진 외모와는 달리 성품은 낫낫하다.
토박이들과 외지에서 들어온 우리들 사이에 이해관계가 엇갈릴 때면 양쪽을 다독여 풀어내는 것도 그녀다.
한 해 제사만도 여남은 번인데 큰제사 파지 날은 동네 사람을 청해 음식을 나눈다.
자신의 삶이 소진할 때까지 혼신을 다하는 것, 그것이 생명으로 이 땅에 온 책무라는 듯 수크령은 샛바람에도 굴하지 않는다.
태양이 풀어놓았던 햇살 거둬들이는 동구길, 바람에 몸 낮추었다가 다시 일어서는 수크령 몸짓 위로 박새 떼가 자우룩하게 날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