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국내 증권사들의 패밀리오피스 사업은 글로벌 자산관리사 UBS·JP모건 등이 확립한 ‘자산관리(WM)+기업금융(IB) 결합 모델’로 사업 영역을 확장하며 단순한 투자 수익 관리가 아닌 기업주의 경영 자문 기능까지 수행하고 있다.
대표적 사례로 클래시스 창업주인 정성재 대표 부부가 꼽힌다. 시가총액 4조 원대 미용 의료기기 업체 클래시스의 정 대표 부부는 삼성증권이 관리하는 초고액자산가 고객으로 부인 이현주 씨는 삼성증권 최고경영자(CEO)포럼의 회원이다. 매년 100여 명의 CEO, 최고재무책임자(CFO), 2세 오너를 초청하는 이 포럼은 한투증권의 ‘진우회’를 견제하기 위한 고액 자산가 네트워크다. 이 씨의 동생은 글로벌 화장품 브랜드 닥터자르트 창업자로 누나가 운영하던 자회사를 맡은 것을 계기로 회사를 2조 원대 가치로 글로벌 기업에 매각했다. 의료·뷰티·투자까지 이어진 이들의 네트워크는 ‘한국형 자본가 가문’의 전형으로 꼽힌다.

20일 금융투자 업계에 따르면 증권사의 고액 자산가 전담 서비스인 패밀리오피스가 자산관리(WM)를 넘어 기업 경영과 승계, 세무 컨설팅 등 가문 설계 서비스로 자리매김했다. 과거 성혼 주선, 자녀 취업, 부동산 개발 자문 등 개인 중심의 서비스에 머물렀다면 기업 외환 관리, 법률 자문, 가업승계 컨설팅 등 종합 금융 솔루션을 제공하는 형태로 진화하는 것이다. 금융권 관계자는 “다이소 오너의 차녀는 삼성증권 CEO포럼 멤버로 기업가치 1조 원 시절 5000억 원을 증여받았고 현재 지분가치는 4조 원 이상으로 불어났다”며 “패밀리오피스를 통해 가문 헌장 및 유언장 관리, 자녀 교육 컨설팅 등 맞춤 서비스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은 변화는 고액 자산가의 수요 다변화와 맞물려 있다. 단순 투자보다 기업 경영과 승계, 절세 전략을 아우르는 통합형 금융 서비스에 대한 수요가 커진 영향이다. 업계 관계자는 “패밀리오피스가 이제는 경영 참모와 자산관리인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고 전했다.
증권사들이 관리하는 패밀리오피스는 크게 세 부류로 나뉜다. 창업 1세대 은퇴로 승계를 준비 중인 전통 오너 가문, 기업 매각으로 수천억 원대 현금을 확보한 엑시트(투자금 회수) 오너 가문, 그리고 가상자산이나 스타트업으로 부를 축적한 신흥 자산가층이다.
유정화 삼성증권 SNI 법인전략담당 상무는 “최근 몇 년 사이 기업 엑시트를 마친 오너들이 빠르게 늘며 기관투자가급 자산을 가진 사업가들이 ‘가문 전체 관점의 자산 관리’를 원한다”면서 “거액 자산을 믿고 맡길 수 있는 금융기관 선호도도 함께 높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들의 투자 성향은 세대와 부의 형성 방식에 따라 뚜렷이 갈린다. 전통 오너는 여전히 안정적 운용을 선호하지만 엑시트 오너나 신흥 자산가층은 공격적인 투자 성향을 띈다. 개인투자자들이 미국 빅테크나 인공지능(AI) 대표주를 매수할 때 이들은 중국 AI·전기차 기업이나 글로벌 대체투자에 선제적으로 뛰어드는 식이다.
신경애 한국투자증권 GWM전략담당 상무는 “엑시트나 인수합병(M&A), 가상자산으로 부를 일군 자산가들은 국내 투자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며 “이들은 자산 1000억 원 이상을 운용하며 고위험·고수익 상품 비중을 늘려가는 추세”라고 밝혔다.
창업 1세대들이 은퇴를 준비하며 2~3세대로의 자산 이전이 본격화되는 시기를 맞아 가문 고객의 관심은 승계·세금·글로벌 분산으로 다양해졌다. 지주회사 전환과 유언 대용 신탁 등을 활용해 세대 간 자산 이전을 구조화하는 시도도 활발하다. 김대일 신영증권 부사장은 “가문이 3대를 넘길 확률은 10%, 4대까지 이어질 가능성은 3%’라는 현실을 체감한 창업주들이 가문의 지배구조 분산과 가족 간 분쟁 등을 막기 위한 법적·세무적 설계에 나서고 있다"고 했다.
국내 세제 부담을 피하기 위해 싱가포르 등 해외에 패밀리오피스를 설립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실제 스위스 발렌베리 가문처럼 자산 1조 원 이상 글로벌 패밀리오피스들은 자국 외에도 싱가포르·영국·독일 등에 거점을 두고 있다. 이런 사례를 접한 뒤 사업 자산과 가족 구성도 지정학적으로 분산해야 한다는 필요를 느낀 것이다.
최근엔 해외에 세운 패밀리오피스를 통해 활황인 국내 주식에 투자하는 사례도 늘었다. 한국 세법상 비거주자나 외국 법인이 한국 상장주식을 거래할 경우 양도소득세가 면제되고 과세권은 해당 국가에 있다. 싱가포르는 법인 투자소득에 비과세 정책을 적용하기 때문에 세금 부담이 사실상 ‘0’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