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했던 지청천(1888∼1957) 장군에게는 지복영(1920∼2007)이라는 딸이 있었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독립운동에 투신한 그는 1940년 여자의 몸으로 광복군에 입대해 소령까지 진급했다. 여성들을 향해 “민족의 반수(半數)를 차지한 여성 동포들이 조국을 광복하고 신(新)국가를 건설하는 데 한 역군이라는 것을 범(凡) 한국 사람은 다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이라고 일갈했다. 그러면서 “이중 삼중의 압박에 눌리어 신음하던 자매들! 어서 빨리 일어나서 이 민족해방 운동의 뜨거운 용로 속으로 뛰어오라”고 호소했다. 그의 이름 복영(復榮)에는 ‘나라의 영광을 되찾는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하니 지 장군 부녀의 삶에 새삼 숙연함을 느낀다.
지청천 장군은 1914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애초 그가 입학한 곳은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였다. 그런데 1907년 일제는 대한제국을 겁박해 정미7조약을 체결하고 이를 근거로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했다. 육군무관학교 재학생들에겐 자퇴하거나 아니면 일본 육사로 재입학하는 방안 가운데 택일할 것을 요구했다. 지 장군은 ‘호랑이(일제)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는 심정으로 일본 육사행(行)을 택했으니 쓰라린 심정이 오죽했으랴 싶다. 일본 육군 소위로 임관하고 5년이 지난 1919년 기어코 탈영에 성공해 독립운동 진영에 가담한 그는 독립군 장교 양성을 위한 신흥무관학교 교관이 되었다.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40년 중국 충칭(重慶)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에 광복군이 창설됐다. 한국의 독립을 위해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연합군 일원으로 항전하는 것이 광복군의 목표였다. 광복군 총사령관은 다름아닌 지청천 장군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며 광복군은 일본군 점령 하의 한반도에 침투하는 이른바 ‘국내 진공 작전’을 계획했다. 하지만 1945년 미군의 원자폭탄 투하에 놀란 일본이 예상보다 일찍 항복하면서 국내 진공 작전은 무산되고 말았다. 씁쓸한 심정으로 해방된 조국에 돌아온 지 장군은 이승만 정권 아래에서 제헌 및 2대 국회의원, 무임소 장관 등을 지내고 1957년 타계했다.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의 운영 주체인 전쟁기념사업회가 올해 1월 호국 인물로 지청전 장군을 선정하고 지난 24일 기념관 2층 중앙홀에서 현양 행사를 열었다. 2020년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중단된 호국 인물 현양 행사가 5년 만에 재개됐으니 반갑기 그지없는 일이다. 지 장군의 장손인 지상철 광복회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외손인 이준식 전 독립기념관장, 지형수 충주지씨대종회장 등 유족들이 헌화와 분향을 해 행사의 품격을 높였다. 전쟁기념사업회 백승주 회장은 “이 시대를 사는 국민들이 한 번 더 나라를 생각하고 사랑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백 회장의 말처럼 호국 인물 현양 행사가 애국의 가치를 드높이는 기회로 자리매김하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김태훈 논설위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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