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년을 창고에 갇혀 있던 음악이 다시 청중을 만났다. 서울 대학로 예술가의집 라운지룸에 조성된 음악감상실 ‘르네쌍스, 르:네쌍스’에서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대구에서 처음 문을 열었던 전설의 음악감상실 ‘르네쌍스’를 재현한 공간이다.
대학로서 부활한 음악감상실
1951년 대구 피난지서 문 열어
전쟁 중에도 예술 뜨겁게 향유
"카네기홀에도 이런 관중 없어"

1950년대 이미 ‘꿈의 스피커’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던 JBL 하츠필드 스피커의 깊고 웅장한 소리가 부활한 음악감상실을 꽉 채웠다. 1986년 서울 종로에서 간판을 내린 르네쌍스가 문예진흥원(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 기증한 바로 그 스피커다. 음악 역시 그 시절 르네쌍스의 음반을 디지털 음원으로 전환해 들려준다. 지직거리는 미세한 잡음까지 그때 그 시절 그대로다. 지난 5월부터 일반에 공개된 ‘르네쌍스, 르:네쌍스’는 현재 인터넷 예약제로 운영 중이다.
각자 휴대전화로 손쉽게 음악을 듣는 시대에 옛 음악감상실 재현이 뭐 대수롭냐는 반응도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막상 찾아 가본 르네쌍스는 이야기의 보고였다. 전쟁과 혼란의 궁핍한 시절에도 예술을 즐길 줄 알았던 우리 문화 DNA를 목도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트럭 두 대에 레코드 싣고 피난길
르네쌍스의 설립자 박용찬(1916~1994)은 당대 제일가는 음반 수집가였다. 전북 임실 갑부 집 막내아들로 태어나 일찌감치 서구 클래식 음악에 눈을 떴다. 1940년 일본 메이지대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8000여장의 레코드를 가지고 왔을 만큼 컬렉션 규모가 컸다. 이후 서울에 자리 잡았던 박용찬은 1951년 1·4후퇴 때 레코드를 트럭 두 대에 나눠 싣고 피난길에 오른다. 그리고 그해 대구 피난지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고전 음악감상실 르네쌍스의 문을 열었다.
휴전 이후 르네쌍스는 서울 인사동으로 자리를 옮겼고 이어 종로1가 영안빌딩으로 이전해 문화예술계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했다. 문인 신동엽·전혜린·마종기·천상병, 음악가 나운영·김만복, 화가 김환기·변종하 등이 르네쌍스의 단골손님으로 전해진다.
1960, 70년대 전성기를 지나 1986년 경영난으로 문을 닫기까지, 르네쌍스의 역사는 체계적인 기록으로 남지 못했다. 설립자 박용찬이 문예진흥원에 기증한 오디오 설비와 6000여장의 음반, 관련 서적들도 수장고에서 잊혀져갔다.


조각조각 흩어져 있던 르네쌍스의 기억은 지난해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예술기록원이 소장기록물 전시 ‘원테이블’을 준비하면서 모이기 시작했다. 옛 신문 기사 검색을 통해 박용찬이 “음악이 주는 해방감과 평안을 대중과 나누고 싶어” 음악감상실을 열었다는 것도 알게 됐다.
무엇보다 소중한 자료는 미국 음악잡지 ‘에튀드(Etude)’의 1953년 10월호에 실린 기사다. 아르코예술기록원은 지난해 전시를 준비하며 이베이를 통해 바로 그 잡지를 구했고, 이번에 재현된 대학로 르네쌍스에도 전시해뒀다.
"전쟁 상처 와중에도 노래하는 민족"
기사의 제목은 ‘한국 협주곡(Korea Concerto)’. 미군 병사 로버트 엘킨스와 게리 제닝스가 한국전쟁 중 대구 르네쌍스를 방문한 경험을 담은 글이다.

“지난겨울 어느 추운 밤, 몇몇 미국인들과 수십 명의 한국인들과 함께 음악 연주를 들었다. 우리의 연주회장은 결코 카네기홀 같은 것이 아니었다. 평균적인 미국 가정보다도 더 작은 공간이었다. 그러나 이 소박한 장소는 한국 남부의 음악 애호가들에게 하나의 성지가 되어있었다. 전쟁으로 황폐화된 한국에서 고전음악의 ‘르네상스’가 다시 온다면, 그것은 이곳의 주인 박용찬씨 덕분일 것이다. 나라가 전쟁의 상처로 몸부림치는 와중에도, 한국은 여전히 노래하는 민족이다. 음악 애호가들, 학생들, 음악가들이 매일 밤 이 소박한 공간에 모인다.”
글은 이들의 체험담으로 이어진다. 저녁 내내 차를 마시며 음악을 들었지만 이용 금액은 1달러도 채 안됐다고 했다. 이날 이들은 러시아 작곡가 무소륵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을 신청한다.
“방의 한쪽 벽은 음반 앨범으로 천장까지 빽빽했다. 각 앨범에는 한국어 기호가 표시된 식별태그가 붙어있었다. 이 단순한 분류 시스템으로 박씨는 몇 초 만에 음반을 찾아냈다.”
그리고 이들은 전했다. “어느 카네기홀 콘서트도 ‘르네쌍스’에 모인 청중만큼 감사하는 관객을 가져본 적이 없다.”
이렇듯 르네쌍스의 가치는 단순히 아날로그 감성을 되살리고 향수를 달래주는 데 있지 않다. 한국 근현대 음악 향유 문화를 보여주는 자산이자 문화적 자부심의 근거가 된다. 잊혀졌던 이름, 박용찬과 르네쌍스를 다시 끄집어내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