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아침, 얼어붙은 내 위장을 녹이는 ‘달콤한 구원자’

2024-12-28

토마토는 과일일까, 채소일까? 해묵은 논란이라지만 인생을 살면서 한 번도 고민해 본 적이 없는 주제다. 단것을 심하게 좋아해서 나이가 들수록 건강 관리가 골치일 정도인 사람에게 토마토는 재고의 여지 없이 채소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빨갛고 동글동글한 모양을 핑계로 과일생크림케이크 위에 토마토를 올리는 만행을 저지르는 동네 빵집들이 없었다면 어릴 적에 토마토를 더 좋아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디저트로 받아들일 수 있는 토마토는 숭덩숭덩 썰어서 설탕을 잔뜩 뿌려서 다 먹은 후 그릇에 고인 즙까지 마시고 싶어지는, 정작 건강에는 그리 좋지 않다는 식으로 내준 것이었으니까. 지금 생각하면 그 정도의 ‘쌩설탕’을 뿌리기만 해도 어울린다는 점이 토마토가 달콤한 채소로서 가진 저력일 것이다.

피자나 파스타 소스가 된 토마토만 먹다가 ‘이것이 내 인생 요리구나!’ 하고 깨달은 것이 이태원 더베이커스테이블의 토마토 수프를 먹었을 때였다. 그날도 추운 겨울날이라 따뜻한 샌드위치 이상으로 위장부터 속 전체를 뜨겁게 데워주는 수프를 먹고 싶어 토마토 수프를 주문했다. 내 머릿속의 토마토 수프는 그때까지 정원의 각종 채소와 콩을 넣어 만든다는 이탈리아의 미네스트로네였다. 맛있고 푸짐하지만 어딘가 토마토 소스와 라구 소스의 연장선에 존재하는 짭짤하고 감칠맛 나는 음식. 하지만 내가 받아든 것은 토마토의 과일다운 모습이 드러나는 달콤한 크림 토마토 수프였다. 결코 디저트로 생각될 만큼 들쩍지근하지는 않지만 마늘이나 셀러리를 떠올리게 하는 채소다운 풋내가 두드러지지도 않고, 잘 익은 토마토의 단맛만이 부드러운 크림과 어우러진 수프. 그때까지 제일 아끼던 달콤한 채소 수프인 옥수수 수프의 자리를 단번에 꿰차는 달콤한 인생 수프였다.

과일같은 달콤한 채소 토마토…제대로 된 통조림 하나면 인생 요리 ‘토마토 수프’ 뚝딱

볶은 마늘·양파와 함께 보글보글…바질이나 우유·크림은 ‘선택’

버터 바른 식빵 사이에 치즈 한 장, 앞뒤로 구워 수프와 먹으면 극락이지!

인생 요리란 말하자면 그런 것이다. 푸드 에디터이자 음식 전문 번역가로 세상의 거의 모든 음식을 어떤 형태로든 사랑하지만 메뉴판에서 발견하면 유난히 이 메뉴만 볼드체로 보이는 것? 아무리 지쳐 쓰러져 있을 때도 이걸 내 입에 넣을 수 있다면 무거운 몸을 일으켜 요리를 시작할 수 있는 것? 오히려 힘들면 더 간절하게 생각나는 것?

그 이후로 내 캠핑 짐의 필수 보존식으로 한 자리를 차지한 것이 토마토 통조림이다. 지금처럼 물자가 풍부한 시기에 통조림은 품질이 떨어지는 음식으로 생각되기도 하지만, 사실 냉동 채소처럼 가장 신선하고 맛있을 때 가공한 보존식은 오히려 제철 아닌 음식보다 맛과 영양을 잘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토마토 통조림이다.

사실 살면서 마트에서 구입한 토마토 중에 태양의 강렬한 힘이 느껴질 정도로 잘 익고 맛이 좋은 것을 만난 적은 없다. 그냥 없다. 가장 맛있는 시기까지 완숙해서 유통하기가 힘들기도 하고, 품종도 다르다. 평이 좋은 농장에서 직거래하거나 직접 길러서 수확한 토마토에서 사탕 같은 단맛을 느낀 적은 있지만 역시 일상을 살다 보면 그보다 좋은 품질을 손쉽게 구할 수 있어야 내 식재료로 느껴지기 마련이다.

언젠가 우리나라에서 활동하는 이탈리아인 셰프를 여럿 취재할 기회가 있었는데, 모든 식재료를 까다롭게 구하며 그와 동시에 이탈리아산보다 지금 살고 있는 이 땅의 제철을 중요시하는 그들도 토마토만큼은 이탈리아의 산 마르자노 토마토 통조림을 사용한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뒤집어 생각하면 통조림 기술의 발달 덕에 어디서나 캔만 따면 이탈리아에서 볕을 쬐고 자란 토마토를 먹을 수 있으니 엄청난 일이 아닌가.

아무리 짐을 잘 챙겨도 빼먹는 것이 생기고, 주변에서 장을 보기가 어렵지만 그래도 가족의 배는 채워야 하는 캠핑에서는 이런 보존식을 잘 챙기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계획했던 음식을 만드는 데에 꼭 필요한 재료를 봉지째 두고 왔다 하더라도 햇반과 참치 통조림, 라면이 있으면 일단 배를 채울 수 있는 것과 비슷하다. 렌틸이나 병아리콩, 옥수수 통조림도 간단하게 안주나 간식을 만들기 좋은 보존식이고 미트볼이나 카레 등 3분 레토르트 제품도 챙겨 놓으면 제법 거창해 보이는 음식을 눈속임으로 재깍 만들기 좋다. 토마토 통조림도 스파게티면과 함께 간단한 파스타를 만들 수 있는 것은 물론 예전에 소개한 인도식 커리나 채소 수프의 베이스가 되는 등 효율적인 범용성을 자랑한다.

특히나 겨울 캠핑의 아침 날이 되면 토마토 통조림이 나를 구원한다. 겨울 음식은 원래도 길거리의 어묵 꼬치처럼 차가운 공기 속에서 손과 배를 따뜻하게 해주는 감각으로 인기가 많지만, 겨울 캠핑에서 따뜻한 이불을 벗어나 아침 식사를 만들기 시작하면 정말 따뜻한 음식이 생존과 직결된다는 실감이 난다. 지난밤 모닥불은 꺼지고 온기가 사라진 캠핑 스토브 앞은 차갑게 얼어붙어, 내가 불을 피우고 무언가를 만들지 않으면 그대로 냉기가 파고든다. 여기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 미리 계획을 세웠던 좀 덜 따뜻하고 좀 더 잘 식는 캠핑 아침 메뉴는 접어두고 가장 나를 따뜻하고 기분 좋게 해주는 익숙한 음식을 만들고 싶어진다. 그러면 가방을 뒤져서 통조림을 찾는 것이다.

토마토가 주인공이면서 달콤함과 감칠맛이 조화를 이루는 토마토 수프를 만들려면 필요한 것이 많지 않다. 그것이 캠핑 요리로서의 장점 중 하나다. 우선 잘게 썬 마늘과 양파를 버터에 가볍게 볶는다. 그리고 400㎖들이 토마토 통조림을 하나 따서 가위로 토마토를 잘게 자른다. 이걸 통째로 냄비에 붓는 것이다. 그리고 빈 통조림 캔에 생수를 가득 채워서 냄비에 붓는다. 이것은 캔에 남은 토마토를 훑어내고 물을 계량하는 역할을 동시에 한다.

만일 바질이 있다면 넣고, 없으면 빼도 된다. 소금과 후추로 간을 하고 양파가 완전히 익어서 수프가 살짝 걸쭉해질 때까지 끓인다. 이렇게만 해도 소금 간이 맞고 설탕을 조금 더 넣어 토마토의 신맛과 조화를 이루도록 하면 일단 맛있다. 하지만 만일 여기에 채수를 사용한다면? 우유나 크림을 살짝 두른다면? 달콤하고 부드러운 토마토 크림 수프가 완성되는 것이다. 스틱 블렌더로 곱게 갈면 진짜 좋겠지만 캠핑에서 그렇게까지는 무리이므로 그냥 토마토 과육이 달콤하게 씹히는 맛을 즐긴다.

만일 토마토 수프를 끓이는 동안 시간 여유가 된다면 그릴 치즈 샌드위치를 꼭 만들어 보자. 버터를 바른 식빵 사이에 잘 녹는 슬라이스 치즈를 끼우고 앞뒤로 구우면 완성되는 간단한 샌드위치다. 실제로 미국에서 1920년대부터 지금까지 사랑받는 토마토 수프와 그릴 치즈 샌드위치의 조합은 나에게도 ‘인생 조합’이다. 본디 대공황이 시작되면서 저렴한 대량 가공식품으로 만들 수 있는 메뉴 구성으로 등장했다고 하는데, 첫출발은 빈곤해도 지금까지 살아남은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냥 같이 먹는 것을 넘어서 토마토 수프에 푹 담가 치즈 크루통인 양 떠먹으면 버터에 구운 빵에 스며든 토마토 수프와 녹아내린 치즈의 조합이 추위와 배고픔을 모두 잊게 해 준다. 비싼 재료라고는 들어간 것이 없는데 도대체 왜 이렇게 맛있는 것인지 갈기갈기 해체하며 생각해봤을 정도다. 토마토와 크림, 치즈, 그리고 빵. 돌이켜보면 성공을 보장하는 피자의 조합이다. 자칫 라면 한 그릇으로 끝날 뻔한(그것도 좋아하지만) 싸늘한 겨울 캠핑의 아침 식사가 토마토 통조림 하나로 이토록 달콤해지다니. 통조림 기술의 발전 만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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