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침에 일어나니 허리의 묵직한 통증이 어제의 예감을 현실로 만들었습니다. 급격히 늘어난 체중을 무리하게 감량하는 과정에서 근육도 잃은 인과응보였습니다. 써야 할 원고가 쌓여 있었지만 그 역시 허리가 버텨줘야 가능하기에, 자주 찾는 한의원으로 차를 몰았습니다.
출퇴근 시간의 한 시간 이동은 도시 생활자에게는 일상입니다. 평소 같으면 지인과 통화하거나 음악·팟캐스트로 시간을 보냈겠지만, 마감을 앞둔 자에게 그러한 여유는 사치입니다. 자투리 시간이라도 아이디어를 얻고자 AI를 호출했습니다. 글쓰기의 출발은 보통 다이어리를 펼치고 생각의 조각들을 스크린 위에 모으는 일이지만 오늘은 달랐습니다. 종이도 노트북도 없는 자동차 운전석에서 AI와 대화를 나누며 생각의 흐름을 시작한 것입니다.
이동 속에서 시작된 창작 실험
전통과 혁신이 만나는 운전석
일상이 작업실이 되는 시대

불쑥불쑥 떠오르는 엉뚱한 생각에도 AI는 적극적으로 답을 주었고, 저는 그사이 생각의 고리를 연결해 나갔습니다. AI가 최종 판단과 글의 색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색다른 표현의 제안, 논리 검증, 반복 확인에서 꽤 훌륭한 도반의 역할을 해 주었습니다. 한의원에 도착했을 때 이미 원고의 윤곽이 완성되었습니다.
아날로그 시절, 공책 가득 단어와 문장을 흩뿌리고 글의 구조와 메시지를 찾던 습관은 시대의 변천 속에서도 본질은 그대로였습니다. 종이 대신 컴퓨터, 연필 대신 키보드가 자리 잡았을 뿐입니다. 얼마 전 서울에서 강연을 위해 울진으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편도 4시간 이상 걸리는 긴 여정 속 기차 객실은 저만의 집필실이 되었고, 8시간 동안 1만 자 넘는 글을 쓰며 집중의 극치를 경험했습니다. 움직일 수 없는 환경이 오히려 저에게 작업에 온전히 빠져들게 했습니다.
이제 자동차도 집필실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차와 차이가 있다면 펜과 노트북을 쓸 수 없기에 대화만으로 글을 쓰는 새로운 창작실이 된다는 것입니다. 기술의 빠른 혁신에도 아직까지 운전은 아날로그적입니다. 손으로 핸들을 잡고, 발로 페달을 밟습니다. 그런 공간에서 디지털의 정점인 AI와 대화를 나누는 경험은 전통과 혁신이 운전석이라는 작은 공간에서 조화를 이루는 순간입니다.
자동차는 이동의 자유와 동시에 저만의 몰입의 공간을 제공합니다. 방해 요소를 최소화해 오롯이 자신과의 대화, AI와의 상호작용에 집중할 수 있게 합니다. 가장 큰 영감의 원천은 변화무쌍한 창밖 풍광입니다. 5월의 햇살,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새롭게 단장된 건물과 활기찬 사람들의 표정은 작업실의 늘 같은 환경과는 다른 신선한 자극을 제공했습니다. 기차 속 집필 역시 작업의 중심은 노트북 모니터에 있기에 차창밖의 모습이 큰 자극이 되진 못했습니다. 하지만 전방을 바라봐야 하는 자동차 운전자에게 다가오는 시시각각 바뀌는 풍경과 도로의 리듬은 새로운 사고의 흐름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를 증강해주는 AI는 단순한 도구를 넘어 사유의 동반자가 되었습니다.
자투리 시간을 소중히 쓸 때 사람들은 더 큰 기쁨을 느낍니다. 등굣길 작은 단어장을 손에 쥐고 영어 단어를 외우던 기억이 그렇습니다. 그 자투리 시간이 본편이 되고 있습니다. 출퇴근 시간에 AI와 대화를 통해 업무를 처리하고, 이동 중에 많은 일을 해결하는 시대가 왔습니다. 그렇다면 출퇴근 시간은 더 이상 단순한 이동이 아닌 생산의 시간입니다.
최근 AI는 e메일 요약, 답장 작성 등을 통해 처리해야 할 e메일함을 모두 비운다는 의미의 ‘인박스 제로’를 사무직 직원들의 꿈에서 현실로 바꾸고 있습니다. 출근길에 대부분의 업무를 끝내고 회사에 도착했을 때는 더 이상 처리할 일이 거의 남지 않는 시대가 가능해졌습니다. 이렇게 되면 출근 중의 업무 처리 시간을 근무 시간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개인 시간으로 남길 것인지에 대한 새로운 논의도 필요합니다. 출근하던 중 일을 다 처리하면 사무실에 도착하기도 전에 다시 퇴근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자동차 안에서의 새로운 변화는 단순히 업무 효율성을 넘어 생활 방식 자체를 재편할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반복되는 업무는 AI에게 맡기고, 우리는 창의성과 넓은 시야를 갖는 일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자동차 밖 풍경을 통해 새로운 영감을 얻듯, 다양한 자극은 창의적 사고를 확장시킵니다. 자동차는 단순한 이동 수단을 넘어 창의성과 생산성을 극대화하는 ‘달리는 작업실’이 되고 있습니다.
만약 자율주행이 성큼 다가와 운전대에서 손을 놓게 되면 다시 키보드를 잡게 될까요? 아니면 뇌파 기반과 같은 새로운 기술로 증강된 능력으로 새로운 생산 활동을 하게 될까요?
확실한 것은 지금까지 그래왔듯 앞으로도 우리는 새로운 적응을 계속해 나가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조금 두렵지만 동시에 기대되는 미래입니다.
송길영 Mind Min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