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 여성 노동자’ 엄마들의 노동사

2025-04-28

지난 4월 8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홈플러스 피해당사자 증언대회’를 취재했다. 사모펀드 MBK가 홈플러스 기업회생절차를 신청한 뒤 직영 노동자, 협력업체 노동자, 입점업체 점주, 배송 노동자 등 홈플러스 종사자들이 불안해진 상황을 공유하는 자리였다.

그날 내게 인상 깊었던 건 의원회관 세미나실을 가득 메운 50대 여성들이었다. 노란 조끼를 입고 모인 이들은 피해당사자 증언대회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하하 호호 반갑게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중장년 여성들이 이렇게 많이 모인 걸 본 게 언제였을까 싶다가도 이들이 계산, 진열 업무 등을 하며 마트 운영을 떠받치고도 하루아침에 자본의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에 한숨이 나왔다.

그들을 보니 엄마 얼굴이 겹쳐 보였다. 자식 다 키우고 경제생활을 하기 위해, ‘○○ 엄마’ 대신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기 위해…. 홈플러스 여성 노동자들도 저마다의 이유로 일을 시작했을 것이다. 엄마처럼 경력단절 후 진입장벽이 높지 않은 직장을 찾았을 것이다. 그래도 홈플러스는 대형 마트니까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을 터였다.

1960년대생인 엄마는 갑자기 기운 가세에 대학 진학과 꿈을 포기하고 스무 살 때부터 생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결혼·육아로 인한 공백기를 거치고 내가 일곱 살 무렵부터 엄마는 다시 일하기 시작했다. 엄마의 표현을 빌리면 엄마는 “일하지 않으면 아픈 사람”이라 쉼 없이 일했지만, 늘 계약직을 벗어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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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기억하는 엄마의 첫 복귀직은 ‘포스코 견학 안내 홍보사원’이다. 광양제철소를 견학하러 온 관광객을 데리고 공장 이곳저곳을 방문하며 철이 만들어지는 공정을 설명하는 일이었다. 계약직이라도 엄마는 붙기 위해 악착같이 노력했다. 어린 나를 앉혀두고 공정별 설명이 빼곡히 적힌 A4용지 여러 장을 그대로 외우는지 체크해보라고 할 정도였다. 홍보사원 일이 끝난 뒤로도 엄마는 규모가 작은 회사를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일했다.

그러던 엄마는 50대 초반에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나이가 들수록 계약직 취업도 어려워지자 “건강만 허락한다면 자격증으로 평생 일할 수 있지 않겠냐”는 이유였다. 엄마 친구들도, 주변 언니들도 비슷한 이유로 이 자격증을 많이 준비한다고 했다. 한 직장에 정규직으로 소속되지 않은 중장년 여성 노동자에게 노후 보장으로 남은 선택지는 자격증으로 대변되는 돌봄 노동뿐이라는 생각에 마음 한구석이 시큰거렸지만, 엄마의 선택을 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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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임금이 적어도, 어깨가 결리고 다리가 아파도 이 일 자체를 뿌듯해했다. 이왕 하는 김에 사회복지사 자격증도 따서 지역에 요양보호센터를 운영해볼까 하는 작은 꿈도 꾸기 시작했다.

이 지면에 엄마의 노동사를 길게 할애한 것은 주목받진 않지만 묵묵히 이 사회를 굴러가게 하는 중장년 여성 노동자 중 한 명으로 기록하기 위함이다. 국회에 모인 홈플러스 여성 노동자들도 저마다의 노동사를 간직하고 지금 이 순간도 만들어가고 있을 것이다. 중장년 여성의 노동이 누군가로부터 피해를 봐야만 기사로 반짝 조명되기보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빛이 나길 간절히 바란다.

▼ 탁지영 기자 g0g0@kh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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