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장의 페미니즘’ 저자
여성 활동가 이현경

남초 사업장, 유일한 여성 활동가
남성은 투사·여성은 싸움닭 호명
노조엔 가부장제와 성차별 만연
주변적 존재 취급 속 오기로 버텨
2016 촛불의 패배는 쓰라린 교훈
광장의 2030 여성 외면해선 안 돼
이현경은 1996년 서울도시철도공사(현 서울교통공사)에 공채로 들어갔다. 당시 관리자한테 수시로 들은 말은 “여자들이 이 직장 아니면 나가서 마트 캐셔밖에 더 하겠냐?” 등이다. 이현경은 “당시 여성 노동자를 폄하하고, 편 가르는 차별적 발언임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고 말한다.
이현경은 역무원이다. 여자로만 대상화되는 일은 늘 겪는다. 30년 전과 다르지 않다. 이현경과 동료 여성 노동자들은 지금도 아가씨, 아줌마라는 말로 종종 불린다. 한 동료는 “너 말고 남직원(을 불러달라)”이라는 요구를 받기도 했다. 반말로 고성을 지르다 남성 노동자가 나타나면 공손해지는 취객도 여럿이다.
이현경은 노동운동을 하겠다는 목적으로 입사했다. 한동안 이 ‘남초 사업장’의 유일한 여성 활동가였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동원”해 가사노동, 양육과 활동을 병행했다. 그는 “여성성이 드러나는 역할 수행을 이유로 활동을 정리하는 것은 ‘여자는 어쩔 수 없어’라는 고정관념을 강화하리라 생각해 경계했다”고 말한다. 악착같이 버티고 들은 말은 “이러고 다니는 거 남편은 아냐?”다. 아이 돌볼 사람이 없을 때는 집회 때도 데리고 나갔다. “엄마 잘못 만나서 애가 고생”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남성 조합원들은 쉼 없이 지배적 성역할을 주지하려 했죠. 오기로 버텼어요.”
“여성성 무시해도 나는 여성 노동자”
이현경의 <작업장의 페미니즘>(산지니)은 철도, 건설, 자동차 등 남초 사업장 현장 여성 활동가 10명과 여초 사업장 활동가 2명을 심층 면접한 내용을 담았다. 이현경은 여러 여성 활동가가 “여성 노동자들이 남초 사업장에 들어가는 사건을 ‘침입’으로 표현”한 점에 주목한다. 이현경은 “여성 노동자는 남초 사업장에 ‘잘못’ 들어온 존재이자 들어오지 말았어야 하는 대상, 주변적인 존재로 여겨졌다”고 했다.
이현경은 2010년대 이후 ‘미투’와 ‘페미니즘 리부트’ 때 정체성과 활동 문제를 되돌아봤다. “여성성을 무시해도 나는 여성 노동자일 수밖에 없었어요. 여성성 부정은 남성성 뒤에 숨으려는 비겁한 행동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2021년 성공회대 시민평화대학원에 들어가 실천여성학을 전공했다. 2023년 2월 낸 석사 졸업 논문 ‘노동조합 여성활동가의 ‘페미니즘’ 실천과 활동가 재생산 연구: 남초 사업장 사례를 중심으로’가 우수 논문상을 받았다. 책은 논문을 확장한 것이다.
책엔 성역할 부여, 성별 고정관념 강화 행위 같은 사례를 여럿 넣었다. 여성이 밥하고, 빨래를 도맡은 일도 나온다. 과거지사가 아니다. 2022년 새마을금고에서 여성 노동자에게 ‘밥 짓기’ ‘남직원 화장실 수건 빨래’를 지시한 직장 내 괴롭힘 사건이 불거진 게 한 예다. ‘호칭’도 쉽사리 바뀌지 않는 문제다. 여성 노동자들은 비혼이면 “야~” 또는 “어이”, 기혼이면 “아줌마”다.
급식노동자를 ‘찬모’…이름찾기 투쟁도
노동자들은 급식노동자를 ‘이모님’ ‘여사님’이라고 부르는 게 흔하다. 이현경은 “서울메트로 공사 사규에는 급식노동자를 ‘찬모’라고 명시했다”고 전했다. ‘반찬 해주는 엄마’다. 이현경은 “이런 호칭에 여성의 노동자성을 인정·존중하는 의미는 없다. 여성 노동자들은 먼저 노동자로 인정받고, 이름을 찾기 위한 투쟁을 벌여야 했다”고 말한다.
이현경은 노조에 만연한 ‘가부장제’ ‘성차별’ 문제를 지적한다. 예를 들어, 맹렬하게 활동하는 남성은 ‘투사’로 불리지만, 여성은 ‘싸움닭’으로 호명된다. 여성은 ‘부위원장’이나 ‘문화국장’을 맡는다. 파업 때도 여성 간부들은 핫팩 나눠주기, 밥하기 같은 일을 한다.
책은 2022년 9월14일 지하철 역사에서 업무 중 동료에게 살해당한 ‘신당역 사건’ 등 성폭력 문제도 다룬다. 이현경은 당시 앞장서 싸웠다. 노조의 “소극적이고 모호한 태도”를 비판한다. “‘젠더폭력’ 규정이 작업장 내 젠더 갈등을 유발한다면서, 이 사건이 ‘직장 내 성폭력’임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여성이 제기하는 성폭력 문제는 정치적 목적과 조직적 이해관계로 제기된 문제로 호도되면서 피해자는 사건 중심에서 가려진다”고 했다.
이현경이 강조하는 건 여성들의 노조 참여다. 남성 중심 문화를 바꾸는 게 과제다. “가부장적 노조가 기득권을 포기하는 것은 현실적 역학구도가 바뀔 때만 가능하다. 여성 노동자의 힘이 상승하고 여성 활동가 세력을 더 무시할 수 없을 때 노조의 남성적 권력은 여성 노동자와 대화하고 연대할 것”이라고 했다.
여성과 광장 문제도 이야기했다. 이현경은 “페미니즘이라는 무기를 들고 2016년 ‘박근혜 탄핵’을 위한 촛불광장에 나갔다가 패배를 맛봤다”고 했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같은 발언이 난무했죠. 여성들을 ‘기특하다’고 칭찬하며 대상화하려 했어요.” 투쟁 성과는 민주당이 가져간 점, 여성운동이 자기 세력화를 하지 못한 점, 문재인 정권에서 노동자와 여성, 소수자들 요구는 ‘나중에’로 외면당한 점 때문에 2016년 광장이 실패했다고 본다.
“싸움은 결코 헛된 게 아니었다”
이현경은 “그 싸움이 헛된 건 아니었다”며 2025년 광장의 여성에게서 희망을 찾는다. 그는 ‘남태령 대첩’ 등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여성과 농민, 여성과 장애인, 여성과 학생, 여성과 노동자를 잇는 학습의 장, 연대의 장으로 확장했어요. 내란과 탄핵 정세에서 여성이 주도력을 발휘하고 새로운 투쟁의 장면을, 문화를 만들고 있음을 사회적으로 인정받았습니다.”
2030 여성 존재 자체를 외면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민주당 대선 후보 이재명은 지난 11일 비전발표회 뒤 ‘광장을 주도했던 2030 여성들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는 기자 질문에 “빛의 혁명 과정에는 모든 국민이 함께했다. 국민들이라는 거대 공동체의 모두의 성과”라고 답했다.
이현경은 “동문서답”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국민 모두의 참여를 부인하는 것이 아닌데, 여성과 국민이 다른 주체인 것처럼 얘기합니다.” 이현경은 이 발언이 대선 정국에서 의도적인 여성 지우기라고 본다. “여성 의제 설정과 추진에 소극적이고, 나중으로 미뤄왔던 이재명과 민주당의 일관성 있는 태도의 연장”이라며 “여성들이 안전하고 평등하게 노동할 권리, 폭력에 희생당하지 않을 권리 등 광장에서 여성들이 요구하고 외쳤던 내용들을 어떻게 수렴하고 보장하려 하는지 이재명과 민주당에 확인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