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서 520광년 떨어진 ‘WASP-127b’ 분석
시속 3만3000㎞ 바람…우주 최고 강풍 기록
로켓 비행 속도와 유사…지구 제트기류는 미풍
중심별 방사선 영향 가능성 크지만 추가 분석
# 우주비행사 쿠퍼(매슈 매코너헤이)와 물리학자인 브랜드(앤 해서웨이)는 미국 항공우주국(NASA) 소속의 탐사대원이다. 이들이 찾으려는 것은 은하계 밖 ‘제2의 지구’다. 환경 파괴로 지구에서 식량 위기가 급격히 가중되면서 인류가 옮겨서 살아갈 새 터전을 찾으려는 것이다.
이들이 먼 우주로 이동한 뒤 처음 착륙한 곳은 ‘밀러 행성’이었다. 여기에는 생명의 근원인 물이 풍부했다. 문제는 풍부해도 너무 풍부하다는 것이었다. 육지가 아예 없었다. 게다가 엄청난 규모의 쓰나미까지 정기적으로 닥쳤다. 이래서는 인류 정착이 불가능했다. 탐사대는 실망감을 안은 채 다른 천체인 ‘만 행성’으로 기수를 돌렸다.
만 행성에는 단단한 육지가 있었다. 인간이 발을 디딜 수 있고 기지도 세울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여기서도 문제가 있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대기를 구성한 기체가 지구와는 달랐기 때문이다. 미국 공상과학(SF) 영화 <인터스텔라> 속 얘기다.
이 영화에서 묘사된 밀러 행성과 만 행성은 모두 사람이 편안히 살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곳이다. 이점을 설명하려고 동원된 공간적인 배경이 끝도 없이 펼쳐진 바다(밀러 행성)와 숨 쉴 수 없는 대기로 덮인 대지(만 행성)였다.
그런데 실제 우주에는 영화보다 훨씬 더 이상한 행성이 많다. 최근 그런 곳 하나가 포착됐다. 과학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해당 행성의 특징은 바로 ‘강풍’이었다.
독일 괴팅겐대 과학자들이 주도한 국제 연구진은 지난주 지구에서 520광년 떨어진 우주의 한 외계 행성에서 엄청난 세기의 바람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연구 결과는 국제학술지 ‘천문학 및 천체물리학’에 실렸다.
주인공 행성의 이름은 ‘WASP-127b’다. 이 행성이 과학계에 처음 포착된 것은 2016년이다. 바위가 없는 기체 행성이다. 태양계 행성인 목성과 비교하면 지름은 약 1.3배다. 질량은 10분의 1 정도다. 대기를 이루는 기체는 주로 수소와 헬륨이다. 온도는 약 1100도에 이른다.
최근 연구진은 유럽남방천문대(ESO)가 칠레에서 운영하는 세계 최고 수준의 관측장비 ‘거대 망원경(VLT)’으로 WASP-127b를 꼼꼼히 관찰하는 프로젝트를 실행했다. 그동안 알지 못했던 비밀이 WASP-127b에 숨겨져 있을 가능성을 짚으려고 한 것이다.
관측 결과는 연구진을 깜짝 놀라게 했다. 연구진은 “WASP-127b 적도 상공에서 엄청난 속도의 바람이 불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무려 시속 3만3000㎞짜리 바람이 존재한다는 점을 확인한 것이다. 마하 26에 이르는 극초음속이다.
연구진은 “바람이 이렇게 세차게 부는 외계 행성은 이번에 처음 발견됐다”고 강조했다. 현재까지 외계행성은 총 5800여개가 확인됐다. 넓디넓은 우주에서도 이런 ‘바람의 지옥’은 인류의 망원경 앞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는 얘기다.
시속 3만3000㎞짜리 바람은 대체 어느 정도의 강풍일까. 뭘 상상하든 그 이상이다. 지구에는 고도 약 1만m에서 제트기류가 부는데 빠르기는 시속 100~200㎞, 아주 빠른 곳에서도 500㎞를 넘지 못한다. 태풍에서 나오는 바람 역시 최고 시속 300㎞를 넘기 어렵다.
태양계 내 다른 행성에서는 어떨까. 태양계에서 가장 빠른 바람이 부는 곳은 해왕성이다. 최고 풍속은 시속 1800㎞다. WASP-127b에 비하면 산들바람 수준이다.
WASP-127b의 강풍과 비슷한 속도를 내려면 인공 물체를 써야 한다. 제트엔진이 달린 민간 여객기(시속 900㎞)나 전투기(시속 2400㎞)로는 역부족이다. 로켓엔진의 힘을 빌려야 한다. 지구 궤도에 인공위성을 올리기 위한 로켓 속도는 시속 약 2만8000~4만㎞이다. 이래야 겨우 WASP-127b 바람과 비슷하게 속도를 맞출 수 있다.
이런 강풍은 왜 불까. 아직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연구진은 중심별에서 쏟아지는 방사선이 대기를 휘젓는 역할을 할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실제로 WASP-127b는 중심별과의 거리가 약 720만㎞, 즉 지구와 태양 거리의 5%밖에 안 된다. 중심별의 방사선에 직격탄을 맞을 만한 거리다.
외계행성의 바람 속도를 재는 정밀 장비들은 동체 크기가 비교적 작고 극단적인 온도 변화에 노출돼야 하는 우주망원경에는 실리지 못한다. 연구진은 향후에도 지상망원경을 통한 연구에 속도를 붙일 계획이다. 연구진은 “WASP-127b의 바람 움직임을 향후 다른 행성 연구에도 활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