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희망’이라는 소녀의 투쟁기 <폭풍 다음에 불>

2025-02-14

이 책, <폭풍 다음에 불>은 두 종류의 힘을 이야기한다.

우리에게 먼저 드러나는 힘은 세계를 가두고 짓누르는 힘이다. 이 힘은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트레일러에, 보호구역에, 쪽방에 몰아넣고 질식사시킨다. 이 힘은 다양한 얼굴로 우리 삶을 파고들어 세계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힘이다.

첫 번째 힘이 가두고 내리누르는 힘이라면, 두 번째 힘은 솟구치고 흘러넘치는 힘이다. 가두는 힘처럼 명확한 얼굴을 갖고 있지 않아 우리 눈에 잘 드러나지 않지만, 사실 이 힘이야말로 세계의 근원적인 힘이다. 솟아나는 힘이 있으므로 그것을 가두려는 힘이 생겨난다. 저자는 이 힘을 ‘풍요’라고 부른다.

이 책은 두 번 시작한다. 분노에서 시작하고, 다시 희망에서 시작한다.

분노에서 시작하는 이유는 가두는 힘에 의해 끊임없이 반복되는 죽음이 우리를 분노하게 하기 때문이다. 가두어 죽이는 힘의 위세가 갈수록 커지고 또 빨라지고 있다. 세계를 ‘멸종’역으로 밀어붙이는 이 힘을 멈추라는 비상 사이렌 소리도 점점 커진다.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막을 수 있을지 그 방법을 상상하기가 너무 힘들다. 우리의 분노는 두려움과 절망에 가까워진다.

분노는 솟구치는 힘이지만, 두려움에 빠진 분노는 쉽게 덫에 걸리고 만다. 이 책이 희망에서 다시 시작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의 분노가 절망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분노의 힘을 넘쳐흐르는 생성의 힘, 즉 풍요로 연결하려면 희망이 필요하다. 희망이 이 책의 주제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 책의 또 다른 이름은 ‘희망’이다.

<폭풍 다음에 불>은 저자의 앞선 두 책, <권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크랙 캐피털리즘>에 이은 세 번째 책이다. 저자는 첫 번째 책을 할머니, 두 번째 책을 딸, 세 번째 책을 손녀 책이라고 소개한다. 희망이라는 이름의 이 손녀 책은 엄마보다 할머니보다 강한 욕망을 품고 있다.

손녀인 희망은 반드시 승리하기를 원한다. 가두는 힘에 맞서 확실하게 이기고 멸종으로 달려가는 세계를 멈춰 세우기를 바란다. 넘쳐흐르는 힘으로 세계를 짓누르는 어둡고 좁은 터널을 무너뜨리기를 간절히 바란다. 확실한 승리를 원하는 희망은 우리를 가두는 모든 것과 맞서 싸우며 나아간다.

우리를 멸종으로 몰아가는 괴물의 심장은 화폐다.

희망의 적은 수많은 얼굴을 가진 히드라다. 괴물에 맞서 승리하기를 원하는 희망은 우리를 가두는 괴물의 모든 얼굴들, 우리를 틀 짓는 모든 정체성들과 싸우며 나아간다. 지배하고 파괴하는 온갖 얼굴들을 무찌르며 승리의 기쁨을 느낀다. 하지만 부족하다.

“모자라, 모자라, 모자라.”

괴물을 완전히 쓰러트리려면 그것의 중심으로 나아가야 한다. 괴물의 심장은 화폐다. 괴물의 심장을 찌르지 못하면, 즉 이 세계를 지배하는 화폐를 폐기하지 못하면 희망이 원하는 확실한 승리를 얻을 수 없다. 그런데 희망이 멈칫한다.

“괴물의 심장을 찌르는 게 정말 가능할까?”

희망의 머뭇거림은 사실 넘쳐흐르며 투쟁하는 우리 모두의 머뭇거림이다. 많은 모험 이야기 속 주인공이 그렇듯 희망은 투쟁하는 집합적 힘을 상징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성을 해방할 수 있다! 우리는 장애인을 해방할 수 있다! 우리는 흑인을 해방할 수 있다! 우리는 동물을 해방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화폐의 지배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까?

이 책은 희망의 조력자다.

<폭풍 다음에 불>은 그 어느 책보다 아래로부터의 힘의 실재성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그 힘이 맞서야 할 적의 모습 또한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저자는 희망이 바라는 확실한 승리로 나아갈 수 있도록 힌트를 주는 조력자가 된다.

순간 자기 힘을 의심하며 머뭇거리는 소녀, 희망에게 주어진 힌트는 괴물의 질병이다. 세계를 짓누르는 괴물의 위력이 너무나 커서, 마치 그 힘이 영원할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괴물은 아프다. 우리가 느끼는 괴물의 폭발적인 힘은 심각한 질병에 걸린 괴물의 마지막 발악이다. 문제는 모두가 괴물과 함께 죽을 것인가, 혹은 먼저 괴물을 죽이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 것인가이다.

책의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공원에 앉아 한숨을 쉬는 소녀의 모습을 보여준다.

괴물과 맞서 싸우며 수많은 생명을 지켜낸 소녀가 공원에서 잠시 쉬고 있다. 하늘은 여전히 괴물의 얼굴들로 뒤덮여 있고 귓가에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맴돈다.

모자라, 모자라, 모자라.

이 목소리는 누구보다 확실한 성공을 바라는 소녀의 마음 깊은 곳에서 울리는 소리이기도 하다. 책은 질문한다. 소녀는 어떻게 괴물의 중심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떻게 화폐의 지배를 폐지할 수 있을까? 분명한 건, 우리 삶을 지배하는 화폐를 폐지하지 않고도 승리할 수 있는 다른 길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화폐를 폐지할 힘은 오직 아래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책이 보여주는 ‘희망’이라는 소녀의 투쟁기는 솟구치는 힘을 상징하는 소녀 ‘희망’이 손에 쥔 분노의 칼로 괴물의 심장을 겨누고, 찔러야만 끝나는 이야기다.

손보미 다중지성의 정원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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