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달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관리에 관한 특별법’이 통과됐다. 20대와 21대 국회에서 잇따라 임기만료 폐기된 끝에 22대 개원 반년 만에 본회의 문턱을 넘었다. 11개월 전에 ‘고준위 방폐물 특별법, 21대 국회가 매듭지어야’(중앙일보 2024년 3월 29일자) 칼럼을 쓴 사람으로서 반가운 소식이나, 평탄치 않은 긴 여정의 시작임을 예감한다.
1978년 고리 1호기 가동 이후, 고준위 방폐물 정책은 1983년 이래 아홉 차례 실패를 거듭했다. 1988년 정책은 동일 부지에 중·저준위 영구처분 시설과 사용후 핵연료 중간저장시설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경북 후보 지역 조사(89년), 안면도(91년), 굴업도(95년), 부안(2003년) 등에서 내리 실패한다. 2004년 노무현 정부는 중·저준위 처분장과 고준위 중간저장시설을 별도로 건설하기로 했다. 박근혜 정부와 문재인 정부는 각각 공론화위원회와 재검토위원회를 거치며 기본계획을 수립했다. 그사이 고준위 부지 선정 작업은 뒤로 밀렸다.
그동안 수렴된 원전 지역사회와 각계 의견이 특별법에 반영된 것은 의미가 있다. 특별법은 절차적 정당성과 투명성·안정성 확보를 위해 정부와 국회가 추천한 전문가들로 ‘고준위방폐물관리위원회’ 신설, 주민 참여와 결정권이 보장된 부지 선정 절차, 부지 단계별로 국회에 결과 보고, 중간저장시설과 처분시설의 운영 일정, 관리시설 유치 지역에 대한 지원, 원전 부지 내 저장시설 추가 건설 시 지역주민의 의견 수렴과 지원 등을 담았다.
특별법 제정으로 원자력계, 관계 부처·기관은 바빠졌다. 우선 고준위 방폐물 관리위원회를 구성하고, 6개월 내 하위법령을 제정해야 한다. 특별법에 명시된 대로 2060년 고준위 방폐물 처분시설을 운영하려면 조속히 부지 선정에 착수해야 한다. 관련 기술의 연구개발과 전문인력 확보에도 차질이 없어야 한다. 원자력 관련 기관들은 긴밀한 협업으로 시너지를 내야 한다. 이들 과제는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역사회 수용성을 확보할 수 있는 소통과 거버넌스의 작동이다. 그 기본은 무신불립(無信不立)이다. 선진국 연구에 따르면 원자력 커뮤니케이션에서 신뢰는 ▶정확하고 솔직하며 투명한 의사소통 ▶컨트롤 기능의 공유와 위임 ▶공통의 명분과 정체성 부여 ▶합작의 성과와 목표 창출 등에 달려 있다. 특별법 제정은 국가가 책임지고 고준위 방폐물을 안전하게 관리하겠다는 대국민 약속이다. 신뢰 기반의 사회적 협상 역량으로 고준위 방폐물 관리에 성공하는 날, 우리는 명실상부한 원자력 기술 수출국으로 우뚝 설 것이다.
김명자 KAIST 이사장·전 환경부 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