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북 화가 김용준의 회상

2025-10-15

2007년 10월 어느 날, 평양 시내를 달리던 버스가 개선문 앞에서 멈추었다. 안내원이 “40분의 자유 시간을 드리겠습네다” 했다. 어디를 가지? 나는 김황원(金黃元)이 울며 내려왔다는 부벽루(浮碧樓)나 을밀대(乙密臺)의 현판을 늘 보고 싶었지만, 먼 곳이란다. 앞을 보니 민예품 상점이 있었다. 친구 신우재(愼右宰·전 청와대 대변인)가 문득 말했다. “화랑이나 들어가 볼까?” “좋지.”

화랑을 둘러보던 신우재가 감탄하듯 말했다. “김용준(金瑢俊·1904~67·사진)이다.” 젊었을 적에 그의 수필을 읽은 적은 있지만, 화가로서 그리 대단한 인물일 줄 몰랐다. 그림은 소녀가 화초에 물을 주는 반절짜리 수묵화 소품이었다. 신우재는 탐나듯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얼만가요?” “800유롭네다.” “100만원이잖아!” “카드도 받습네다.” 신우재는 발길을 돌렸다. “왜 안 샀우?” 말이 없지만, 북한에서 100만원의 카드를 긁기가 마음 편치 않았을 것이고, 이 작은 상점에 걸린 저 고가품의 진위도 의심스러웠다.

김용준은 일제 시대에 저명한 화가였다. 운명인지,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인공치하에서 그는 서울대학교 예술대학장(임시)을 맡았다. 곧이어 국군이 올라오자 그는 “부역자”로 몰리는 것이 두려워 월북했다지만, 이태준(李泰俊)과 헤어지기 싫어 따라간 것이 아닐까? 북한에서 그는 조선미술가동맹위원장을 지낼 만큼 화려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자살했다.

2000년에 김정일의 내연녀였던 성혜림의 언니 성혜랑이 자서전에서 “김용준은 김일성의 사진이 게재된 신문에서 수령의 사진을 잘 오려 보관하지 않고 폐지수거함에 버렸다가 반동으로 기소되자 걱정스러워 자살했다 (…) 그는 보고 죽으려 해도 다시 못 볼 사람이다”고 썼다. 그 뒤 신우재는 그때의 장면을 회상하며 미문의 수필을 남겼다(『나무야 고맙다』).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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