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산업은 20년 주기로 주력산업이 교체돼왔습니다. 산업은 이미 바뀌었는데, 금융의 구조만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습니다.”
윤병운 NH투자증권 사장은 15일 서울 여의도 금융투자협회에서 자본시장연구원 주최로 열린 ‘생산적 금융 확대를 위한 증권업계 역할과 성장전략’ 세미나에서 “섬유·조선에서 반도체·자동차를 거쳐, 이제는 인공지능(AI)·바이오·첨단소재 중심으로 넘어가는 변곡점을 맞고 있다”며 자본시장의 역할을 강조했다. 특히 그는 “금융이 산업의 미래를 지원하는 수준을 넘어 ‘설계자’의 역할로 진화해야 한다”고 밝혔다.
윤 사장은 현재 종합금융투자사업자의 기업금융(IB) 업무 중 약 48%가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에 집중돼 있지만 모험자본 투자는 2% 미만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이 같은 구조가 산업 전환기 생산적 자금 순환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다. 윤 사장은 담보대출 모델로는 AI·바이오 같은 첨단산업의 빠른 확장과 연구개발(R&D) 지원이 어렵다고 덧붙였다.
특히 국내 성장기업들이 시리즈 B~C 단계에서 자금 조달 병목을 크게 겪고 있다고 진단했다. 미국·영국 등 금융 선진국에서는 기업공개(IPO) 직전 프리IPO 라운드 등을 통해 대규모 성장 자본이 유입돼 스케일업이 이뤄지지만, 한국은 이 과정이 생략돼 낮은 밸류에이션으로 상장하는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는 설명이다. 그는 그 해법으로 지분 희석을 최소화하면서 빠른 성장 지원이 가능한 그로스 PE(소수지분 투자, Growth PE)와 메자닌 PD(사모대출, Private Debt)를 제시했다. 그로스 PE는 경영권 인수 없이 소수 지분만으로 성장자금을 공급하는 사모투자이며, 메자닌 PD는 전환사채(CB)·신주인수권부사채(BW)·후순위채 등을 활용해 부채의 안정성과 자본의 유연성을 동시에 확보하는 구조다.
윤 사장은 또 석유화학·철강 등 전통산업의 구조적 침체를 국가적 과제로 규정하고, 정부의 K스틸법과 산업 구조조정 방안에 맞춰 금융투자 업계가 부실채권(NPL) 매입, 회생기업자금 대여(DIP), 인수합병(M&A) 자문 등 구조조정 금융의 주체로 나서야 한다고 제언했다. NH투자증권에 따르면 발행어음과 종합투자계좌(IMA) 제도 확대로 2030년까지 증권 업계의 기업금융 투자 여력이 현재 22조 원 수준에서 112조 원으로 약 5배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그는 “혁신 기업에 대한 성장자본과 전통 산업의 구조조정자본이 현재 우리나라 생산적 금융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한편 박용린 자본연 부원장은 “벤처기업은 장기 R&D 수요와 무형자산 비중, 수익화 지연 등의 특성으로 간접금융을 통한 신용공급에는 한계가 있다”며 “증권사는 지분·메자닌·채권·파생 등 기업 성장단계별 맞춤형 자본 구조를 설계하고 리서치 기반의 선별·평가 역량으로 다양한 자금 조달을 지원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를 위해 그는 발행어음 인가와 IMA 지정의 탄력적 심사, 신기술사업금융업 허용 재개, 중기특화 증권사 인센티브 강화 등을 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