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원전 기우는 정부…원전업계 깊은 한숨

2025-10-03

탈원전 2막, 원전업계 전전긍긍

“어쩔 수 없죠. 다시 원점이 됐으니까.”

지난달 29일 창원 의창구 북면에 있는 영진테크윈 공장에서 만난 강성현 대표는 “이제 좀 잘 될 거란 희망이 있었는데 정권이 바뀌니 다시 원위치”라며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그는 “왜 이렇게 (원자력이) 정치에 좌지우지하게 된 건지 모르겠다”라고도 했다.

영진테크윈은 원자력 제어봉 구동장치와 원자로 냉각펌프 등 원자력발전소의 핵심 기능과 관련된 부품을 생산하는 업체다. 지난달 29일 찾은 공장은 저녁 늦게까지도 ‘위이잉~’하는 기계 소리로 가득했다. 겉으론 호황기 같았다. 강 대표는 그러나 “공장이 다시 가동된 건 두 달이 채 안 됐다”고 했다. 그는 “윤석열 정부 초 재개 승인 난 게(2022년 7월 신한울 3·4호기) 이제야 저희한테 일감이 온 것”이라며 “지난 3년간은 진짜 고역이었다”고 했다.

보통 제작부터 납품까지 최소 3년이 걸리는데, 탈원전을 한 문재인 정부 때는 그나마 이전 물량으로 버텼으나 이후엔 일감 자체가 뚝 끊겼다는 것이다. 30억원대 매출은 8억원대로 고꾸라졌다고 한다. 지난해엔 15억원이었는데 대출을 갚으려 억대 설비를 하나둘 매각한 게 수입으로 잡히면서다. 강 대표는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다른 일을 알아보다 되레 사기를 당해 빚이 배로 불었다”며 “대부분 설비가 수억원대라 한 번 구입할 때 큰맘 먹고 사는데, 정권 때마다 손바닥 뒤집히듯 하니 감당이 되겠냐”고 한숨을 내쉬었다.

원전 주기기 업체인 부산 녹산산단의 경성정기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인력도 매출도 반토막이 났다. “너무 힘들었다”며 힘겹게 입을 연 한태교 이사는 “최근에도 회사를 접어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했을 정도”라고 했다. 120억원대를 오가던 수주잔고는 탈원전 정책 이후 40억원대로 주저앉았고 기술자 절반 이상은 다른 업종으로 떠났다. 한 이사는 “기댈 곳은 원전밖에 없는데 정권 바뀔 때마다 이랬다가 저랬다가 (힘들다)”라며 “최근 분위기만 봐도 국내선 더는 (원전을) 건설하지 않겠다는 건데 많이 불안하다”고 했다.

실제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장관은 1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현 정부 임기 안에 재생에너지를 지금의 3배 수준으로 확대하겠다”면서 원전에 대해선 “안전성을 담보로 해서 (원전) 수명을 연장할 수 있다”고만 했다. 그는 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따라 예정된 신규 원전 2기를 두고도 “국민 의견을 들어볼 것”이라고 했다. 백지화 가능성을 열어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김 장관은 “재생에너지를 확대하되 발전 비용을 낮춰 요금 인상 압박을 조절하겠다”고 했지만 전문가들은 회의적이다.

정권따라 원전 정책 오락가락창원 노즐회사 임원 “5년 전 악몽 살아나”

손양훈 인천대 교수는 “(재생에너지는) 에너지저장장치(ESS)를 달고 송전망을 건설하는 등 시스템 구축비까지 포함하면 가장 비싼 방법”이라며 “재생에너지를 대폭 늘리면 전기요금이 몇 배가 뛸지 모른다”고 말했다.

‘탈원전’은 원전 산업 종사업체에겐 다시 목도하기 싫은 악몽이다. 원전 기자재 등 원전에 들어가는 수백만 개의 부품 중 단일부품을 생산하는 소규모 하청업체들에겐 더하다. 정부가 이들의 명줄을 쥐고 있는 셈이다. 한국원자력산업협회가 지난해 7월 발간한 원자력산업실태조사에 따르면 원자력 산업 총매출액은 2016년 27조원에서 2018년 20조원으로 줄었다가 2022년에서야 25조원으로 반등했다. 그 사이 대표적 원전 대기업인 두산에너빌리티의 협력사 발주액도 2015년 1924억원에서 2021년 769억원으로 급감했다. ‘탈탈원전’의 윤석열 정부 때인 2022년에서야 400여 협력업체에 1541억원어치의 물량을 주문했다. 이게 원전 하청업체들에겐 ‘가뭄 끝 단비’였다. 하지만 2023년 한국원자력산업협회가 국내 원전업체 1037곳 대상으로 벌인 조사에서도 여전히 업체들은 ‘원전 경쟁력 제약 요인’으로 ‘안정적 수주물량 부족’(32.2%)을 압도적으로 많이 꼽았다. 완전히 ‘해갈’된 건 아니란 의미다.

현장 “국내선 더는 원전 안 지을 분위기”

이런 마당에 이재명 정부가 초기와 달리 ‘탈원전’ 메시지를 내자 원전 업체들은 전전긍긍이다. 원전 노즐을 생산하는 창원 산단 내 B업체 황모 전무는 형편을 설명하던 중 “대통령 당선 전후로 발언 분위기가 달라지지 않았냐”며 목소리가 높아졌다. 황씨는 “지금도 5년 전 악몽을 다시 꾼다”며 “당선 전엔 ‘원전 추진하겠다’ 해놓고 지금 와서 ‘원전 검토’ 의견을 낸다. 안 하겠단 소리 아니냐”라고 했다. 과거 문재인 정부 때처럼 ‘탈원전’을 내걸고 8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서 원전 신규건설을 전면 백지화한 것이 재현되는 게 아니냐고 우려하고 있다. 당시 신규 원전 6기를 백지화하고 수명연장 가동 중이던 월성 1호기도 사실상 가동을 중단했고 노후원전 10기(8.5GW)는 설계 수명을 연장하지 않기로 했었다.

실제 이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엔 공약으로 ‘원전을 포함한 에너지믹스’를 강조해 원전 업계의 기대감을 높였다. 특히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지난 5월 2050년까지 400GW로 늘리는 것을 목표로 삼은 행정명령 4건에 서명하면서 한국 원전 업계에도 특수를 누릴 거라는 장밋빛 전망이 팽배했다. 5월까지 2만5000~2만6000원대를 맴돌던 두산에너빌리티 주가는 5월 이후 급상승해 6월 7만원대까지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달 11일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선 “원전 짓는 데 15년 걸린다” “건설 부지가 있고 안전성 담보되면 하는데, 제가 보기엔 현실성이 없다”며 당선 전과는 다른 말을 했다. 1일부터 원전 사업을 관할하는 기후에너지환경부의 김성환 장관도 곧이어 이전 정부에서 확정된 신규원전 건설계획에 대해 ‘공론화’를 내걸며 백지화할 가능성을 거론하기 시작했다.

최근 고리 2호기의 10년 가동연장 결정이 지연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 게 업계 판단이다. 지난달 25일 고리 원전 2호기의 10년 가동연장 여부를 결정하려고 열린 원자력안전위원회에선 결론을 내지 못했고 10월 다시 열기로 했다. ‘안전성’이 재론됐다고 한다. 정범진 경희대 원자력공학과 교수는 “재가동 심의 안건이 올라갔다는 건 이미 허가 기준이 통과됐단 얘기인데 ‘안전성’을 문제 삼으면 정치적 판단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앞서 이 대통령은 대선후보 토론회에선 “우리의 현실이 있기 때문에 이미 지어진 원전들은 계속 잘 쓰자, 그리고 가동 연한이 지났더라도 안전성이 담보되면 더 쓴 것도 검토하자”고 했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당분간 수출에 초점을 둘 수밖에 없을 것 같다”(양승훈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라는 의견이 있지만, 국내 사업성이 담보되지 않는데 수출이 되겠냐며 회의적 시각도 많다. 한태교 이사는 “수출로 판로를 연다 해도 자국 내에서 하지 않는 걸 수출한다고 하면 이해를 못 하지 않겠느냐”라며 “국내서 계속해서 기술 축적이 이뤄져야 수요가 생기고 해외에서도 수요가 생길 것”이라 했다.

이렇다 보니 진즉에 탈원전한 업체들은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다. 마산봉암공단의 A업체 대표는 “내 판단이 맞았구나 싶었다”고 말했다. 원전 업체에 전력설비 표식 기기를 납품했던 이 업체는 탈원전 정책 당시 매출이 30% 넘게 주는 등 크게 고전한 후 업종 자체를 바꿨다. 그는 “5년마다 사업성이 바뀌는데 투자를 할 수 있겠냐, 사업을 접으란 얘기밖에 안 된다”며 씁쓸해했다.

“에너지 정책 하루살이식으로 하면 안돼”

A업체는 그나마 성공한 경우다. 업종 전환이 쉬운 건 아니어서다. 1990년대 사업을 시작한 신규원전 건설 보조기기 제조전문 C업체 관계자는 ‘울며 겨자 먹기’식 다각화라고 표현했다. 그는 “신규원전 건설 자체를 안 하니 가뜩이나 줄어든 인력으로 공사부터 유지·보수공사·용역까지 닥치는 대로 다 하고 있다”며 “사업 다각화가 더 힘든 게 원전은 전문성도 높아 해당 분야 전문인력을 구해야 하고, 인건비로 기업 이윤은 줄고 매출도 줄고 결국 은행의 빚 상환 독촉까지 이어지게 된다”고 말했다. 연명에 급급하니, 연구개발(R&D)은 꿈도 꾸지 못하는 상황이다. 원전 관계자는 “이대로 두면 한국 원전업계는 기술 경쟁력에서 뒤처져 자연 도태할 수도 있다”라며 “그 틈을 중국 등 해외 업체가 가져갈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튀르키예 정부는 2일 신규 원자력 발전소 건설 프로젝트를 발표하며, 협상 대상국으로 한국 외에도 캐나다·중국 등을 꼽았다.

원전 업계가 장기적으로 우려하는 건 또 있다. ‘탈원전→친원전→탈원전’의 오락가락 정책 여파로 전문·숙련 인력 양성과 수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것이란 점이다. 한태교 이사는 “인력의 절반이 유출됐고 숙련인력을 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라며 “정책 여파로 작업을 쉬면 경력 단절이 되고 기술이 축소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비단 사업체만이 아니라 산업 경쟁력 자체도 떨어지고 있다는 게 업계의 걱정”이라고 했다. 강성현 대표도 “(탈원전) 당시 30% 인력이 감축됐는데 이후 매출이 없으니 신규 인력 충원은 꿈도 못 꿨다”며 “최소 연차가 5년 차인데 숙련인력이라 하긴 어렵다”고 했다.

실제 원자력 공급 산업체 인력은 2016년 2만2000명으로 최대치를 찍은 직후 2017년부터 줄어 2021년 1만8000명으로 감소했다. 양승훈 교수는 “정권을 떠나 원전 산업에 대한 중장기적 로드맵이 부재한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정범진 교수도 “전문성과 정밀함이 필요한 에너지 정책은 하루살이식으로 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외국은 원전으로 유턴하고 있다. 중국은 최근 첨단 산업과 제조업의 필수인 전력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현재 58기인 원전을 2035년까지 최대 180기로 약 4배가량 늘리기로 하고 흔들림 없이 추진 중이다. 블룸버그통신도 29일 보고서를 통해 “미국 원자력 산업이 부활을 준비하고 있다”며 미국의 원자력 발전 용량이 2050년까지 63% 증가할 것으로 내다봤다. 현재 수십 개 기업이 SMR 설계를 개발하고 있다고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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