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크리스마스트리로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한국의 구상나무 군락지에 10여년 전부터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다. 신생대 3기 때부터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반도에서 자생한 구상나무는 보통 해발 1500m 이상에서 자란다. 한라산과 지리산, 덕유산같이 남부지방의 높은 산에 많이 분포해 있다.
지난달 19일 녹색연합 활동가들과 함께 한라산에 올랐다. 한라산은 구상나무의 세계 최대 서식지다.

동이 트기 전, 겨울왕국으로 변해버린 탐방로는 눈꽃을 즐기는 등산객들로 북적였다. 성판악 탐방안내소를 출발해 진달래밭 대피소에 도착했다. 이후 정상까지의 탐방로는 폭설로 인해 통제되고 있었다. 사전 취재 협조 요청과 국립공원 직원의 장비 점검 및 주의 사항을 듣고 통제 지역으로 들어갔다.

허리까지 빠지는 눈을 피해 최대한 다져진 곳을 디디며 산행을 이어갔다.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바람은 거세졌다. 군락지에 도착했지만, 몰아치는 눈보라에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자칫 길을 잃을 수도 있다는 말에 활동가 2명과 기자는 서로의 위치를 수시로 확인했다.

잠시 눈보라가 잦아들자, 마법처럼 드넓게 펼쳐진 구상나무 군락지가 보였다. 설원에서도 푸른 자태를 뽐내야 할 상록 침엽수인 구상나무는 앙상한 가지만 남은 채 죽어 있거나, 죽어가고 있었다.
“죽은 나무가 산을 두르고 있는 거잖아요.” 최황 활동가는 한라산에 죽음의 고리가 퍼지고 있다고 말했다.
고요함도 잠시, 다시 거센 바람에 눈보라가 몰아쳤다. 산 능선을 넘는 바람 소리가 마치 구상나무 비명처럼 들렸다.

세계 최대 서식지가 무색하게 이미 2021년 기준 한라산 구상나무 숲 면적은 1918년보다 절반가량 줄어들었다.
죽음의 원인은 다양하다. 기온 상승, 태풍의 강한 바람, 적설 감소, 봄철 가뭄, 숲의 연령 구조, 수목 노령화, 수분 스트레스, 박테리아 등 복합적인데, 전문가들은 상당 부분 기후위기를 꼽았다.

보름이 지나 경북 국립백두대간수목원을 찾았다. 기후변화에 취약한 산림 생물자원의 체계적 보전 등에 특화된 수목원이다. 국제 종자 저장고인 ‘시드볼트’와 자생식물 종자 공급센터도 있다.



센터 내 양묘장에는 한라산과 소백산 등에서 채집한 종자로 발아시킨 구상나무 묘목 5만본(本)이 자라나고 있었다.
“종자가 겨울을 거치고 봄을 맞이하는 과정에서 원활하게 발아되도록 유도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묘목을 살펴보던 이동준 연구원이 말했다. 그는 건강한 종자를 겨울철에 모래와 흙 속에 넣어 저장하는 ‘노천매장법’을 잘 지켜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국립공원공단은 2012년부터 구상나무 증식 기술 개발 및 현지 적응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
주요 공원별 종자 수집과 초저온 동결보존 기법 개발, 수종별 조직배양 기술을 적용한 묘목 생산을 바탕으로 지리산 세석 일원에 현지 적응 묘포장을 조성해 모니터링 중이다.
김진원 국립공원공단 기후변화연구센터 연구원은 “아고산대 상록 침엽수 분포 전역에 대한 생육 취약지구 평가 및 정밀 모니터링을 각각 5년 및 2년 주기로 수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공단은 고지대에 현장 거점형 연구시설인 ‘기후변화 스테이션’을 운영한다. 상록 침엽수뿐만 아니라 자생식물의 유전자원 확보와 기후변화 영향 실시간 감지 등을 위한 연구시설이다.
관련 기관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구상나무의 고사 속도는 빨라지고 있다.
군락지의 고사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점은 현재 건강해 보이는 개체도 스트레스가 높을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런 속도면 향후 잔존 개체수는 현저히 떨어지고, 더 나아가 소나무 등 한반도 전체 침엽수의 위기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서재철 녹색연합 전문위원이 말했다. 이어 그는 정부가 구상나무를 멸종위기종으로 지정할 것을 촉구했다.

나흘 후, 서 위원과 지리산 천왕봉에 올랐다. 지리산에도 죽음의 고리가 퍼지고 있었다. 등산객들은 잿빛으로 죽어가는 나무를 보며 신기한 듯 사진을 찍기도 했다.

우리 정부와 달리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은 2011년 구상나무를 멸종위기종으로 지정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