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대보름, 부럼 깨셨나요?

2025-02-12

정월대보름에 대한 기억은 세대별로 차이가 크다. 연배가 있으신 분들은 맛있는 오곡밥을 먹은 기분 좋은 날, 어머니가 머리맡에 두신 호두를 아침 일찍 일어나자마자 깨서 먹은 날, 하루에 밥을 아홉번 먹어야 한다며 오곡밥을 담은 큰 양푼을 아예 방 안에 하루 종일 둔 날, 일년 내내 날리던 연의 실을 끊어서 훨훨 하늘을 나는 연을 바라보며 작별 인사를 했던 날, 동네 아이들과 목청껏 소리를 내지르며 쥐불놀이를 했던 날 등의 기억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초등학교 시절, 친구가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 대답하면 ‘니 더위 내 더위’하고 도망치곤 한 기억이 있다. 난 남에게 한번도 더위를 팔아보지 못하고 더위를 받기만 한 셈이었으나, 어릴 적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대학생과 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이들에게 정월대보름에 대한 기억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무엇을 먹은 적도, 무슨 일을 한 기억도 없다는 것이다. 우리 전통 명절 중 하나인 정월대보름이 젊은 세대들에게서 서서히 잊히고 있어 안타깝다.

정월대보름은 표준한국어대사전에서 음력 1월 보름날을 명절로 이르는 말이며, 새벽에 귀밝이술을 마시고 부럼을 깨물며 약밥, 오곡밥 따위를 먹는 날로, 대보름날이라고도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정월은 한 해의 시작이며 그 해를 설계하는 달이다. 대보름달은 한 해의 첫 보름달이 뜨는 날이다. 일년 중 가장 크게 뜨는 달을 슈퍼문이라고 하는데, 정월 보름날에 뜨는 달이 꼭 슈퍼문이지는 않다고 하지만, 달은 음에 해당하여 여성으로 보고 땅으로 표상되며 출산하는 힘, 풍요로움의 상징이다. 정월대보름의 풍습은 지방의 특색을 나타내기도 한다.

지신밟기는 지신밟기라고 쓴 기를 선두에 세우고 농악대가 악기를 울리며 먼저 마을 서낭당을 들르고, 그다음에 마을 집집마다 다니면서? 마당, 뜰, 부엌, 광, 장독대를 도는 놀이이다. 지신을 밟으면 터주가 흡족해하여 가정의 다복과 마을의 안녕, 그리고 풍년이 들게 해준다고 전해온다.

우리가 자주 듣는 대보름날 풍습은 다음과 같다. 더위팔기는 대보름날 아침 해뜨기 전에 다른 사람 이름을 불러 대답을 하면 더위를 사가라고 하는 풍습이다. 그러나 이름을 불린 사람이 먼저 더위를 사가라고 하기도 한다. 더위를 판 사람은 그해 여름에 더위를 먹지 않는다고 여겼다. 에어컨이 없는 시절이어서 더운 여름을 이겨내고자 하는 염원을 놀이로 연결한 것이다.

달맞이는 초저녁에 횃불을 들고 높은 곳에 올라가서 떠오르는 달을 보면서 행운을 비는 풍습이며, 달집태우기는 달집을 만들어 달이 떠오를 때 태우면서 풍년을 비는 것이다.

다리밟기란 다리를 밟으면 다리가 튼튼해질 것이라고 하여 밤새도록 다리를 건너는 놀이이다. 건너는 다리와 사람 다리의 동음이어를 활용한 조상들의 기지가 엿보인다. 12개의 다리를 건너면 12개월 내내 다리가 아프지 않다고 한다. 아마 갑자기 운동하여 그날 밤에는 다리가 더 아팠을 것이다. 달밤에 고무신을 신고 다리를 찾아다니는 모습은 상상만해도 재밌다.

대보름날에는 겨우 내내 띄우던 연을 날려 보냈다. 정월대보름 전날에 이름, 생년월일 등을 적어 연을 떠나보내면서 액운도 멀리 날려 보낸다고 여겼다. 일설에 의하면 정월 보름부터는 농사일을 시작해야 하므로 연날리기에 시간을 보내지 말라는 의미가 있다고도 하고, 정월 보름이 지나면 바람이 줄어서 연날리기에 적합하지 않기에 생긴 풍습일 것이라고 한다.

쥐불놀이는 대보름 전날 밤에 논두렁에 있는 마른 풀을 태우고, 깡통에 소나무 가지를 넣어 돌리기도 하였는데, 송진은 밝은 불빛을 지속하는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풍습은 농작물에 피해를 주는 해로운 벌레를 제거하는 지혜이기도 하며, 어린이들의 야성을 키우는 놀이이기도 했을 것이다.

정월대보름에 먹는 음식은 다양하였다. 오곡밥은 찹쌀, 조, 수수, 팥, 콩 등의 다섯 가지 이상의 곡물을 섞어 밥을 지었다. 귀한 찹쌀을 이용하여 명절의 의미를 더했으며, 찹쌀에는 아밀로펙틴이라는 전분이 한국인이 좋아하는 끈적한 촉감을 가지고 있다. 보리는 골진 부분에 섬유질이 많아 통변을 원활하게 하며, 곡류 중 크기가 가장 작은 조에는 칼슘과 비타민 B군이 풍부하며 소화율 매우 높다. 수수 안쪽에 있는 전분은 한국인 기호에 맞는 맛이고, 콩은 식물성 식품이지만 밭에서 나는 쇠고기라 불리듯이 단백질이 풍부하다.

진채식은 말린 무, 오이, 호박, 박, 가지, 버섯, 고사리 등으로 나물을 해서 먹는 것이다. 지금은 재배 기술이 발달하여 한겨울에도 생채소가 나오고, 냉동 및 냉장으로 식품 보관이 용이하지만, 자연 건조시켜 보관성을 높인 건조채소는 조상의 지혜로운 식품 보관법이기도 하다.

부럼은 대보름날 새벽에 밤, 잣, 호두과 같은 단단한 견과류를 깨서 먹는 것으로 부스럼이 생기지 말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시대적으로 열악한 의료 환경에서도 우리 조상들은 질병 예방의 중요성을 인식하였으며, 견과류에는 불포화지방산 함량이 높아서 심혈관계 질환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

대보름날 아침에 차가운 술을 마시면 귀가 밝아지고 한 해 동안 좋은 소식을 듣게 된다고 하여 가족이 조금씩 술을 마시는 귀밝이술 풍습도 있다. 소량의 술을 가족이 나눠 마시며 대화를 즐기는 화목한 가족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듯하다.

정월대보름 명절 풍속은 과학적인 근거를 가진 조상의 지혜가 담긴 우리의 전통문화다. 앞으로 정월대보름 풍속을 즐기는 사람이 많아지면 좋겠다.

더위도 팔아보고, 오곡밥도 먹고, 부럼도 깨면서 가족 건강도 챙기고,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도 젊은 세대에게 계승하고, 채식으로 지구 환경도 보전하는 일석삼조의 효과를 기대해 본다.

박은숙 <원광대학교 명예교수/前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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