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국가미래전략원 강원택 신임 원장 - 한국 정치 30년간 연구해온 권위자의 개헌론
서울대의 핵심 싱크탱크인 국가미래전략원(전략원)이 ‘개헌’에 발 벗고 나섰다. 30여년간 한국정치를 연구해온 강원택 정치외교학부 교수가 새 원장에 취임하면서 최우선 과제로 개헌을 택한 것이다. “20년 전부터 개헌을 주장해왔지만 지금처럼 개헌 필요성이 절박하고 가능성도 커진 적이 없다”는 그는 “이번에도 개헌 없이 넘어가면 다음 대통령도 ‘윤석열의 비극’을 피할 길 없을 것”이라고 했다. “‘87년 체제’는 완벽히 종언을 고했다. 제왕적 대통령제 대신 책임총리제로 개헌해야 한다”는 강 원장을 만났다.
‘87년 체제’ 파산 뚜렷, 책임총리제로 개헌 필수
지금 체제로 집권? 국정마비·탄핵 재연 불보듯
이재명, 개헌 앞장서야 국민이 리더십 다시 볼 것
민주당도 친명 외엔 개헌 동조…지금이 적기
“뛰는 중국, 엎어진 한국…정치가 문제”
“얼마 전 중국 선전(深圳)의 화웨이 공장을 방문했어요. 국가가 장기적인 목표 아래 유망한 기업을 밀어주는 게 확연해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유망 산업 지원조차 정쟁의 대상이 되고 장기 국가 과제 설정은 꿈도 못 꾸잖아요. 과거처럼 10~20년 뒤를 내다보며 국가는 기획하고 사회가 협력하는 시스템이 사라지면서 나라가 활기를 잃고 젊은이들은 좌절한 지 오래입니다. 그 근본 원인은 정치의 실종, 즉 ‘87년 체제’의 파산입니다. 마침 유홍림 서울대 총장의 권유로 전략원장을 맡게 됐는데, 설립 취지가 말 그대로 국가의 미래 전략을 짜는 두뇌 집단이에요. 기후 위기와 인구 감소 해소 등 연구해온 여러 아이템이 있지만, 그런 목표 달성을 뒷받침할 정치 시스템이 붕괴했으니 이것부터 고치자고 결심했어요. (고장 났다면 그 핵심은요?) 대통령제의 한계가 분명해진 것 같아요.”
대통령제의 한계라면요?
“‘87년 체제’ 초기엔 대통령제가 성공적으로 작동했어요. 노태우·김영삼·김대중 대통령은 북방정책·하나회 숙청·외환위기 극복을 통해 나라를 선진국 반열에 올려놓았죠. 경륜을 검증받은 이들이 대통령이 된 결과인데, 그 뒤 준비 안 되고 정치력도 부족한 이들의 집권이 이어지면서 대통령제의 실패가 분명해진 거죠. 길게는 노무현부터 그런 문제가 시작됐고, 박근혜·문재인 윤석열은 명백히 실패한 대통령들이에요. 대통령이 국가의 자산에서 짐(부채)이 된 겁니다.”
대통령제의 실패는 대통령 개인의 잘못 탓인가요, 제도 자체의 결함 탓인가요.
“같이 가는 겁니다. 국민은 대통령에 강한 힘을 부여해 나라를 바꿔줄 걸 기대했는데, 대통령들은 그 힘을 엉뚱한 데 쓰니 사고가 난 거죠. 미국 대통령제는 달라요. 도널드 트럼프 집권으로 힘들어진 이들은 멕시코·캐나다·중국 등 외국이지 미국인들이 아니에요. 연방제 국가이고 헌법상 권력이 분산돼 국민 일상은 바뀔 게 적거든요. 반면 우리는 대통령 바뀌면 모든 게 바뀌니 잘못 뽑으면 리스크도 어마어마하게 커지죠.”
우리 헌법 자체의 문제점은 뭔가요.
“미국을 건국한 국부들(Founding Fathers)은 권력 집중을 가장 경계해 삼권 분립이 확실한 헌법을 만들었어요. 반면 우리는 1948년 제헌 당시 그런 고민 없이 내각제에 가까운 헌법안을 만들었는데, 이승만 박사가 ‘대통령제 아니면 정부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한 탓에 내각제가 가미된 혼합적 대통령제로 가게 됐죠. 그 뒤 박정희·전두환을 거치면서 대통령에 굉장히 강한 권력이 30년간 축적됐는데 87년에 그 엄청난 대통령 권력은 그대로 두고, 사람만 직선하는 방식으로 개헌한 거죠. 막강한 대통령 권한을 어떻게 조절할 거냐에 대한 고민은 없었어요. 이게 문제죠.”
재판을 5개나 받는 이재명 대표는 거리를 활보하는데 대통령은 구속된 현실을 보면 대통령은 힘없고 당 대표가 센 것 아니냐는 얘기도 있는데요.
“좋은 지적이에요. ‘87년 체제’ 붕괴엔 야당의 책임도 있어요. 여소야대 구도가 여러 번 있었지만 헌정 체제가 작동한 건 야당이 자제해왔기 때문이에요. 정부를 견제해도 강제력 없는 장관 해임 건의안을 내는 데 그치는 정도였죠. 그런데 요즘 야당은 25만원 지원법 등 자신들이 직접 입법을 하거나, 특정 예산을 제로로 만들고 탄핵을 30번 가까이 했거든요. 대통령 고유의 정책과 인사권에 개입하면서 정권과 국회의 충돌을 ‘관례’로 만들어버린 거예요. 이러니 차기 대선에서 야당이 집권하면 지금 여당도 똑같이 할 겁니다. 나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야당이 과거와 달리 ‘자제하지 않는 야당’이 된 이유는요.
“윤석열 대통령이 야당을 끌어안지 못한 탓도 있지만, 야당의 리더십에도 문제가 있는 거죠. 대통령제의 특성은 임기의 고정성입니다. 5년 임기를 채워야 헌정이 유지돼요. 미국만 봐도 탄핵으로 물러난 대통령은 없어요. 하원에서 탄핵안이 통과돼도 상원에서 막았어요. 양원제란 견제 장치에다 야당의 자제도 작용한 거죠. 리처드 닉슨도 자진 사임한 거지, 탄핵당해 물러난 게 아니에요. 그런데 우리는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당한 데 이어 윤 대통령까지 탄핵소추를 당했으니 다음 대통령도 취임 당일부터 야권 세력이 탄핵하겠다고 달려들지 않겠어요? 이런 상황에선 권력을 자제할 의지가 분명한 사람이 대통령이 되도 버티기 힘들어요.”
“남미 짝 난 한국…정치학자로 자괴감”
87년 체제가 완벽히 고장 난 징후는 언제부터 나타난 건가요.
“문재인 정부 때부터라고 봐요. 문 정부는 탄핵당해 물러난 박근혜에 이어 박근혜 정부 인사들에다 전전 대통령인 이명박, 양승태 전 대법원장까지 ‘적폐’란 명목으로 사법처리했잖아요. 보수진영엔 보복으로 보일 수밖에 없으니 참기 어려운 거죠. ‘적폐’란 선악을 가르는 것이라 정치에선 금기인데 문 정부가 이걸 내세워 캠페인을 했으니 그 후유증으로 지금의 극단적인 정치가 굳어진 거죠. 김대중 전 대통령은 박정희·전두환 정권 때 두 번이나 죽을 뻔했지만 가해자들을 끌어안고 통합의 정치를 한 결과 첫 수평적 정권 교체에 성공했어요. 그러나 문재인 정부 적폐 청산은 정치적 후유증이 워낙 크다 보니 3년 전 대선에서 보수·진보 진영은 (윤석열·이재명 같은) 싸움꾼들을 내세웠고 박빙으로 승부가 갈린 바람에 정치가 더욱 극단화한 거죠.”
민주화 체제 37년 만에 ‘계엄령 정치’가 튀어나온 데 놀란 이들이 많은데요.
“정치학계 석학인 후안 린츠 예일대 교수가 1990년 ‘대통령제의 위험성(The Perils of Presidentialism)’이란 논문에서 대통령제에서는 대통령과 의회가 다 정통성이 있는 ‘이원적 정통성(Dual Legitimacy)’이 특징이라 극단적 대립구도가 되면 의회는 대통령을 탄핵하고 대통령은 군을 동원하려는 위험이 생겨날 수 있다’고 했어요. 쿠데타가 빈발하는 남미를 보고 쓴 논문이 한국에 들어맞았으니 학자로서 창피하죠. 린츠의 결론도 마찬가지인데, 결국 대통령의 권력을 분산하는 방법밖에 없어요.”
구상 중인 개헌안 골자가 대통령 권한 분산인가요.
“그렇죠. 정책은 국회가 선출한 총리가 전담하되 대통령이 국회 해산권을 가져 의회의 독주를 견제한다는 골자입니다. 여담인데 지금처럼 장관들이 일하기 좋은 환경이 없대요. 전에는 장관이 뭐 하나라도 하려고 하면 대통령실이 바로 전화해서 간섭하기 일쑤였는데 지금은 그런 전화가 안 오니까 장관들이 할 일을 하고 있다는 거예요. 이게 정상 아닌가요. 그러려면 대통령 권력 분산이 필수죠.”
“이재명·권영세, 개헌 포럼 초청 검토 중”
서울대 전략원에선 개헌 캠페인을 어떻게 전개할 계획인가요.
“우선 전직 총리·국회의장·헌정회장·당 대표 등 10여 명을 초청해 ‘국가 원로들, 개헌을 말하다’란 타이틀로 포럼을 개최할 겁니다. 이재명·권영세 등 여야 대표들도 초청을 검토 중이에요. 이어 정치학자·헌법학자 세미나를 열고 바람직한 개헌안 윤곽을 모색할 계획인데, 개헌은 최대한 서둘러야 하므로 ‘권력 분산’에만 집중해 원포인트 개헌안을 제시할 생각입니다. (개헌 시점은요?) 대선 일정에 얽매이지 않고 즉각 해야 해요. 늦을수록 나라와 국민의 손해가 막심해지니까요.”
개헌은 원내 1당 민주당과 이재명 대표가 키를 쥐고 있는데 개헌의 ‘개’자도 꺼내지 않고 있습니다. 개헌을 논의하면 대선 일정이 그만큼 늦어진다고 여기기 때문 아닐까요.
“지금 헌법 체제로 민주당이 집권한다고 칩시다. 보수진영은 그날부터 대선 불복 운동을 벌이고, 야당이 된 국민의힘도 모든 힘을 다해 저항하겠죠. 민주당 정부가 수적 우세를 이용해 강경대응하면 3년 뒤 총선에선 야당이 이길 수도 있어요. 그럼 또 탄핵 정국이 개시될 겁니다. 게다가 요즘 민주당과 이재명 대표 지지율을 보면, 흔들리고 있잖아요. 대선 때 양자 대결이 이뤄지면 민주당이 꼭 이긴다는 보장도 없어요. 결국 지금 가진 것 많은 민주당과 이 대표가 개헌의 결단을 내린다면 국민은 이 대표를 다시 보게 될 겁니다. 민주당 안팎에서도 친명계 빼곤 개헌에 동의하는 분들이 많은 듯하더라고요. 내가 개헌 이야기를 한 지 20년이 넘었는데 지금처럼 공감대가 큰 적이 없어요. 반드시, 그리고 시급히 개헌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