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는 23일 열리는 유엔 고위급 회기 참석차 출국하는 이재명 대통령의 흉중은 복잡할 것이다. 기조연설을 하고 유엔 안보리 회의를 주재하는 일정은 영예롭다. 하지만 미국 땅 뉴욕으로 향하는 길에는 안도감, 걱정, 책임감이 교차할 것이다. 이 대통령이 미국으로 출발하기 전 조지아 주 현대차-LG엔솔 공장 한국 근로자 석방 교섭이 마무리되어 귀국한 일은 일단 안도할 만하다. 고조되었던 국민적 염려와 공분은 서서히 가라앉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사건은 한·미 간에 관세, 대미 투자를 둘러싸고 앞으로 수많은 장애물이 수시로 튀어나올 수 있음을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다.
실용 친미의 국내적 제약 엷어져
친미-자주의 대립 구도 흔들리고
청년층 실용주의는 미국을 중시
난제는 미국 국내 상황의 변동성
사실 지난 8월 하순 이 대통령이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실용 친미로의 깜짝 전환을 선보였을 때, 많은 이들은 이 대통령이 큰 강 하나를 전략적으로 잘 건넌 것으로 받아들였다. 한·미 간에 대략 양해된 관세 수준, 대미 투자 규모, 그 밖의 이슈에서 대체로 이웃 나라 일본과 유사한 수준의 성과를 거두었다고 평가되었다. (지난 며칠 사이 이러한 양상은 크게 흔들리는 중이다.) 이에 따라서 대미 자주 성향이 강한 여권 지지 세력도 대통령의 방미 성과에 대해서는 그럭저럭 용인하던 참이었다. 이는 20년 전 노무현 대통령이 이라크 파병과 한미 FTA 추진을 통해 실용 친미를 추진하였을 때의 구도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전투병 파병을 요청하던 미국 부시 행정부와 숨 가쁜 협상을 벌이는 동시에 파병에 처절하게 반대하는 여당의 386들에게 엄청나게 시달렸다. 반면 이 대통령의 실용 친미 전환의 걸림돌은 국내 정치보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국내 정치에 있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진보세력이 지원하는 두 대통령의 실용 친미 전환 과정에 이처럼 커다란 대조가 드러나는 까닭은 무엇인가? 2003~2005년 노무현 대통령이 추진하던 실용적 선택에 극렬히 반대하던 진보 시민사회, 당시 여당의 386 의원들이 이제 나이가 들어 인생의 실용주의 주기에 들어선 것인가?
그보다는 두 가지 변화가 여당과 진보 시민사회의 침묵을 불러왔다고 본다. 첫째, 긴밀한 한미 관계의 근간을 떠받쳐 온 보수정당 국민의힘의 추락과 그에 따라 공백이 되어버린 실용 친미 영역을 이 대통령이 점유하게 된 효과. 둘째, 20년 전의 청년들과는 달리 대미 우호 태도가 분명한 오늘날 청년층의 존재감.
먼저 국민의힘의 추락이 가져온 영향부터 보자. 20년 전 노무현 대통령이 이라크 전쟁에 국군 파병이라는 실용적 결단을 꺼내 들었을 때, 찬반 분포는 팽팽했고 파병 찬성 여론은 당시 보수정당인 한나라당이 주도하였다. 따라서 노 대통령의 결단은 반대 세력인 보수당과 보조를 같이하는 것으로 폄하되었고 당시 여당은 파병 동의안을 온몸으로 저지하고자 하였다.
2025년 가을, 구도는 극적으로 변화해 있다. 전임 대통령의 황당무계한 계엄 사태 이후 좌표를 상실한 국민의힘은 트럼프 시대의 한·미관계라는 엄중한 도전 앞에서 지리멸렬할 뿐이다. ‘윤 어게인’이라는 시대착오의 깃발 아래 출범한 국민의힘 지도부나, 감옥에 있는 전임 대통령을 미국이 구하러 온다는 이상한 꿈을 꾸는 일부 지지자들이나, 한결같이 전통 보수 친미의 퇴행적 방황을 가리킨다.
달리 말해, 친미와 자주가 각각의 견고한 성을 쌓은 채 경쟁하던 구도는 무너졌다. 국힘의 추락과 더불어 친미의 전통 성벽이 붕괴되고 대미 우호라는 오랜 대외 인식은 허허벌판에 나 앉게 되었다. 이에 대통령 당선 전에 자주의 성안에 머물던 이 대통령은 관세 전쟁과 신냉전의 흐름 속에서 친미 우호의 들판까지 어렵지 않게 진출한 셈이다. 국힘이 주저앉음으로써 이 대통령은 자주와 대미 우호의 좌우 운동장을 상황에 따라 자유롭게 쓰게 되었다고나 할까.
두 번째 측면은 청년층의 높은 대미 우호 인식이다. 세대별로 구분해서 보자면, 오늘의 2030 세대는 전반적으로 실용주의 성향이 강하다. 이들의 실용주의 세계관은 신냉전의 시대에 미국과 협력의 기조를 유지해야 한다는 관점이 우세하다. 2기 트럼프 정부 출범 이후 청년층의 대미 인식이 다소 주춤하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이들은 미국과의 경제, 안보협력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라고 믿는다. 결국 오늘날 청년 세대의 현실주의 성향이 4050 세대의 자주 성향에 대한 균형추로 작용하고 있다.
정리하자면, 20년 전 노무현 대통령의 대미 실용 전환의 핵심 장애물은 친미-반미 구도가 강력하던 국내 정치였다. 오늘날은 보수정당의 퇴락과 함께 그 같은 대외관의 대립은 적어도 정치적으로는 의미가 후퇴하고 있다. 따라서 이 대통령의 친미-자주 사이의 운신 폭은 넓어진 셈이다. 문제는 복잡하게 뒤얽힌 미국 국내 정치 상황이다. 워싱턴의 풍향이 이대통령의 균형감도, 친미-자주의 구도도 뒤흔들지 모른다.
장훈 본사 칼럼니스트·중앙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