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에 사는 A(9)군은 지난해부터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우울증 치료를 받고 있다. A군의 부모가 자주 다투면서 결국 이혼했고, 이후 엄마 B씨가 재작년 먼저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B씨는 “아이가 어렸을 때부터 불안한 가정환경에 노출된 게 정서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친 것 같다”며 “초등학교 입학 후에는 학교에서 친구들과 관계가 조금이라도 틀어지면 집에 와서 짜증을 터뜨리거나 스마트폰만 보는 시간이 늘어나는 등 말썽이 심해져 병원에 다니게 됐다”고 말했다.
A군처럼 10대가 되기 전부터 우울증으로 병원을 찾는 아동이 최근 4년 사이 2배 이상으로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우리나라 우울증 환자가 110만 명을 넘기며 역대 최대치를 기록한 가운데, 아동·청소년 정신건강에 특히 빨간불이 켜졌다는 우려가 나온다.
31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서미화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우울증으로 진료받은 환자는 2020년 83만 2483명에서 지난해 110만 6603명으로 4년새 32.9% 증가했다.
연령대별로 보면 10세 미만(0~9세)에서 가장 많이 증가했다. 10세 미만 우울증 환자는 2020년에는 991명에 불과했으나, 지난해 2162명으로 118.2%(2.2배) 늘었다.
그다음으로 증가율이 높은 연령대는 10대로, 같은 기간 3만 9817명에서 7만 3070명으로 83.5% 증가했다. 이어 30대(69.7%), 40대(52.4%), 20대(35.9%) 순으로 높은 증가율을 보였다.
아동·청소년의 정신건강이 악화되고 있는 현상은 자살률에서도 나타난다. 19세 이하 자살 사망자 수는 2020년 317명에서 지난해 373명으로 늘었다. 이날 공개된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에도 자살로 숨진 10대가 180명에 달했다.
“학업 스트레스 연령 앞당겨져…SNS도 일찍 노출”
소아정신과 전문가들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사용이 늘어나고, 학업·교우관계로 인한 스트레스를 겪는 연령이 낮아진 점 등을 아동·청소년 우울증 증가의 주요 원인으로 꼽았다. 정유숙 삼성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예전엔 학업·친구관계 스트레스를 주로 중학교 이후부터 경험했다면, 이제는 그런 경험을 하는 연령이 점점 앞당겨지는 추세”라며 “SNS에도 점차 일찍 노출되면서 아이들이 필요 이상으로 많은 정보를 접하게 되고, 이용 시간 조절에 어려움을 겪는 영향도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홍현주 한림대성심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우울한 아이들이 스마트폰을 더 많이 쓰는 경향이 있는데, 그러다가 SNS를 통한 성범죄에 노출돼 더욱 증상이 나빠지는 경우도 있다”며 “10살짜리가 우울증으로 입원하는 사례 등 이전엔 볼 수 없던 심한 증상의 아이들이 늘어난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다만 홍 교수는 “이전보다 쉽게 정신과를 찾는 분위기의 영향으로 환자 수가 늘었을 수도 있다”고 했다.
아동·청소년 정신과 환자가 증가한 데 비해 치료 인프라는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다. 홍 교수는 “자살 시도를 한 고위험군 아이들이 입원할 병상부터 부족하다. 관련 시설·인력 확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서미화 의원은 “정신건강 문제는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고, 조기에 발견해 개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며 “국가 차원의 정신건강 인프라 확충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