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덕노의 식탁 위 중국] 공심채 볶음(淸炒空心菜), 너 어디서 왔니?

2025-09-04

공심채, 영어로는 모닝 글로리라고 부르는 채소 볶음은 한국인들도 좋아한다. 베트남이나 태국 등 동남아로 여행갔을 때, 대만이나 홍콩 내지는 광동성 등 중국 남부를 방문했을 때 먹어 본 음식이다. 요즘은 한국에서도 맛볼 수 있다. 일부 딤섬 전문점이나 베트남 레스토랑에서 제공한다.

중국과 동남아에서 폭 넓게 사랑받는 요리이기에 때로 소모적 논쟁도 벌인다. "공심채는 베트남 등 동남아 음식이다, 아니다, 원래 중국 음식이 동남아로 퍼진 것이다" 등등 그 뿌리를 놓고 다툰다. 원조 논쟁이라는 것이 부질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공심채도 예외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공심채의 기원을 알아보면 중국 음식문화, 나아가 중국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공심채의 뿌리를 찾을 때 먼저 이름의 어원을 알아보는 것도 방법이다. 공심채는 나라마다 부르는 이름이 다르고 별명도 많다. 우선 우리나라에는 없었던 이 채소는 빌 공(空) 마음 심(心)자를 써서 공심채다. 갈대처럼 중심이 텅 비었기에 생긴 이름이다. 대만 홍콩 그리고 중국 광동성에서 이렇게 부른다.

영어 이름은 모닝 글로리(morning glory)다. 직역하면 아침의 영광이라는 뜻이 되겠는데 공심채의 특성과 관련 있다. 공심채는 메꽃과 나팔꽃속 공심채 종의 식물이다. 나팔꽃 과 식물은 이른 아침 활짝 꽃을 피웠다 오후가 되면 시든다. 공심채 꽃도 예외가 아니다. 모닝 글로리라는 이름은 여기서 비롯됐다. 참고로 한국에서 부르는 두 이름 중 공심채는 대만과 홍콩, 모닝 글로리는 동남아를 통해 전해졌다.

베트남어로는 공심채를 라우 무옹(rau muống)이다. 라우는 채소, 무옹은 고대 베트남어로 겨울 시금치라는 뜻이라고 한다. 보통 늦가을 씨를 뿌려 겨울이 막 지난 이른 봄 수확하기에 생긴 이름이다. 흔히 공심채를 겨울 시금치(winter spinach)라고도 하는데 베트남어에서 비롯된 것으로 짐작된다. 어원을 고대 베트남어에 두고 있는 만큼 베트남에서는 먼 옛날부터 재배했을 것이다.

중국어 표준말로 웡차이라고 한다. 한자는 나팔꽃 옹(蕹)자를 써서 옹채(蕹菜)라고 쓴다. 중국 고문헌을 보면 원래는 흙으로 씨앗을 덮어준다는 뜻의 옹(壅)자를 써서 옹채(壅菜)였다. 하지만 어감상 어느 때부터인가 풀을 뜻하는 초 두(艹)를 써서 나팔꽃 옹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처음 흙 덮은 채소라는 뜻의 황당한 이름이 왜 생겼을까? 명나라 때 『본초강목』에 옹채라는 이름이 생긴 내력과 옹채, 즉 공심채가 중국에 전해지는 과정 등이 자세하게 나온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공심채의 뿌리를 알 수 있다.

본초강목에 옹채는 원래 물 속에서 자라는 기이한 식물이었다고 나온다. 중원으로 옮겨 심는 과정에서 흙을 뿌리까지 덮어(壅) 키웠기에 옹채라고 부르게 됐다는 것이다. 바꿔 말해 원래 갈대처럼 습지에서 자라는 수생식물이었는데 옮겨 심을 때 흙을 뿌리까지 덮어 수분을 안정적으로 공급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또 잎이 시금치를 닮았다고 했는데 이것 역시 옛날 중국에서 남월(南越)이라고 불렀던 베트남에서 공심채를 라우 무옹, 즉 겨울 시금치라고 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런만큼 본초강목을 비롯해 옛 중국 문헌을 종합해 보면 공심채의 중국 전파경로도 알 수 있다. 예컨대 『남방초목상』에는 물 위에 떠서 자라는 남방의 기이한 채소라고 했고 8세기 당나라 때 의학서인 『본초습유』에서는 영남 사람들이 이 채소를 심는다고 기록했다. 중국에서 영남은 남령(南嶺)산맥 남쪽으로 대략 지금의 광동성과 광서성을 가리킨다.

당나라 때 동남아 등지의 남방에서 광동 광서 지방으로 전해졌는지 아니면 원래부터 습지가 많은 이곳에서 자생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어쨌든 이 무렵 중원에는 아직 공심채가 퍼지지 않았다.

그러다 중원까지 공심채가 퍼진 것은 명나라 무렵이다. 본초강목에 금릉(金陵)과 강하(江夏) 사람들이 옮겨 심었다고 나온다. 금릉은 지금의 강소성 남경이고 강하는 호북성에 위치한 곳이니 15~16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서 공심채의 재배가 양자강 유역까지 퍼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더 이상 재배 지역이 넓어지지는 못했다. 9세기 당나라 때 지리서인 『북호록』에 습지를 좋아하고 서리와 눈을 싫어한다고 했으니 건조하고 추운 북방에서는 재배가 어려웠을 것이다.

독초의 독성을 중화시키고 가축이 먹으면 살이 찌며 남방인들이 대단히 중요하게 여긴다는 공심채가 북경을 비롯한 화북 지역에서는 보이지 않는 이유다.

역사적으로 공심채가 퍼지는 과정을 살펴보았는데 그러고 보면 공심채 볶음의 원조 논쟁 자체가 한편으로는 우습다. 공심채는 이른바 광동성을 포함해 물 많고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자라는 채소이고 그런 지역에서 발달한 음식일 뿐이다. 원조 논쟁이 우스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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