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문명의 그림자>의 저자 카트린 드 실기는 농촌이 도시에 먹거리를 제공하고 도시는 농촌에 비료를 제공하며 자원의 순환을 이루었다고 설명한다. 쓰레기는 농촌의 토지를 비옥하게 만드는 자원이었고, 이 오물을 차지하기 위해 사용권 논쟁을 벌일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쓰레기가 처치곤란이 된 것은 도시가 팽창하면서 농촌과의 교류가 사라지면서 일어난 변화다. 다른 원인은 쓰레기의 내용물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분해되지 않는 유리나 철 같은 물질이 뒤섞이자 쓰레기를 더 이상 퇴비로 사용할 수 없었다. 발효된 거름 대신 화학비료를 사용하게 되면서 자원의 순환은 마침내 깨지고 만다.
서울은 쓰레기를 다른 도시에 버린다. 서울의 쓰레기는 인천, 안산, 평택, 광주, 양주, 화성, 동두천으로 간다. 경기지역 소각장 처리량의 80%가 서울에서 보낸 쓰레기다. 국내 전체 상황으로 확대해보면, 서울과 경기에서 국내 전체 폐기물의 40%를 배출하는데 정작 폐기물 처리시설이 들어선 지역은 규제가 적고 땅값이 싼 전남과 경북이다. 쓰레기를 발생시킨 지역에서 처리하려고 하는 대신, 낮은 가격에 쓰레기를 버릴 수 있는 지역으로 이동시키는 것이다. 국제적으로도 비슷한 상황이다. 전 세계 쓰레기는 쓰레기를 더 많이 버리는 나라가 아니라, 동남아시아와 같이 규제가 느슨하고 인건비가 낮으며 정치적으로 부패해서 관리가 소홀한 나라로 흘러간다.
강연을 하던 중 ‘환경문제가 그토록 심각하다면 왜 우리가 느낄 수 없느냐’는 고등학생의 질문을 받았다. 답은 간단했다.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주장하는 강연자의 열변이 무색하리만큼, 강의실의 상황이 조금도 시급하거나 위험하지 않았던 거다. 이상고온으로 지구가 뜨거운 건 사실이지만 청정하고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불어 아무도 더운 줄 몰랐고, 화면 속 바다 위에는 쓰레기섬이 펼쳐졌으나 강의실 바닥은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했다. 여기는 쓰레기를 외국에 버리는 한국이었고, 쓰레기를 지방에 버리는 서울이었으며, 모인 사람들 모두가 플라스틱으로 된 옷과 신발을 착용하고 페트병 음료수를 마시고 있었다. 목이 마른데 물을 마시지 못한 경험을 한 이가 단 한 사람도 없는데, 누가 물 부족 문제가 심각하다고 느낄까?
오염물질 배출을 최소화하는 순환경제로의 전환이 시급한 시점인데, 한국은 이 국제적 변화의 흐름에 둔감하고 무심하다. 다른 지역, 다른 나라로 위험요소를 내보내면서 유지하는 도시와 국가들은 당장 오염과 파괴로 재난을 겪고 있는 지역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 문제를 실감하지 못하기에 해결책을 마련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비닐봉지로 인한 재난을 경험했던 방글라데시는 2002년에 이미 비닐봉지 사용을 금지했다. 비닐봉지가 위험해서 사용량을 줄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한국 사람은 아무도 없다.
버리는 문화의 역사는 길지 않다. 일회용품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부터다. 처음 종이컵 자판기가 나왔을 때는 ‘버린다’는 개념조차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사용한 종이컵을 집으로 가져가 다시 썼다. 우리는 다시 버리지 않는 존재가 될 수 있다. 버리지 않는 미래는 가능하다. 만약 우리가 더 이상 버릴 수 없다는 걸 깨달을 수만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