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수래 공수거(空手來空手去)’란 말이 있다. 빈손으로 왔다가 갈 때에도 빈손으로 간다는 뜻이다. 참으로 허망한 말이다. 물론 사람이 죽으면 그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들도 죽음과 동시에 소멸하고 만다. 그러기에 그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명예도 재산도 그걸 움켜쥐고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인생이란 그렇게 공(空)로 왔다 공(空)으로 가버리고 마는 것일까? 그렇게 가버리고 마는 사람도 있겠지만, 개중에는 그가 살았을 때 타인에게 베풀었던 삶의 흔적이 세상 속에 오래 남게 된 사람도 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그런데도 혼자만을 위한 삶을 살다 죽고 나면 어떤 의미도 남지 않는다. 오직 타인들과의 삶 속에서만이 생(生)의 의미가 남게 된다. 그러기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무엇을 향해 살아야 할 것인가? 나도 언젠가는 이 세상을 떠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 내가 쌓아올린 삶이 얼마나 어떤 의미로 남아 있을 것인가? 스스로 내 삶의 존재 의미를 생각해 볼 때 죽어도 죽지 않는 삶이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죽으면 무(無)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생시에 그가 남긴 삶의 흔적들은 죽어도 죽지 않고 남아 그를 기억하게 한다. 결국 우리가 남길 수 있는 것은 내가 나를 위한 행위가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내가 그들에게 남긴 행적만이 남아 있게 될 것이다. 그 길만이 내 존재의 증거, 곧 내 생의 의미와 보람이 아닐까 한다.
불교에서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또 다른 곳으로의 이사’로 보면서 삼라만상의 전 과정을 생멸법(生滅法)과 윤회(輪廻)로 설명하고 있다. 만상은 인연(因緣)에 의해 이루어졌다가, 그 조건이 사라지면 함께 사라진다고 본다. 생(生)하면 반드시 멸(滅)하게 되는 것이 대자연의 이법(理法)이요 순리다. 그러기에 생하고 멸하는 이별의 법칙을 겸허히 받아들이게 되면 이별의 고통에서 다소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은 결코 삶과 분리되어 있거나 그것으로 제로(ㅇ)가 되는 게 아니다. 그냥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생시에 행했던 모든 일들이 모이고 쌓여 무엇으로 다시 태어나 윤회를 거듭하고 있다. 만해 한용운도 그의 시 「님의 침묵」에서 ‘이별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만남의 시작’이라 역설하고 있다.
생시에 선덕을 쌓으면 다음 생에 좋은 곳에 태어나고, 악행을 많이 저지르면 내세에 가서도 고통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세상의 모든 끝은 새로운 시작을 가지고 온다. 춘하추동의 순환도 이러한 자연의 원리에 의해 운행되고 있다. 티베트의 달라이라마의 주치의 베리커진 스님도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고 업(業)에 따라 다시 돌아오기에 진정 우리가 두려워야 할 것은 죽음이 아니라 오히려 ‘오늘 하루의 삶’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하였다.
꽃에도 향기가 있어 / 사람에게도 향(香)이 있어 / 그날 그 모습 / 그가 남긴 / 말 한마디 / 품에 안고 다니기도 하고 / 어떤 이는 / 그것도 모자라 / 기차를 타고 / 비행기를 타고 날아와 / 강 넘고 바다 건너 / 아직도 콩닥거리는 /심장, 만리를 간다. -김동수, 「인향만리人香萬里」 전문
인생의 끝은 어디일까? 피할 수 없는 이 화두 앞에 그게 죽음이든 영생이든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라는 것, 그리고 죽음은 결코 무(無)가 아니라 그 이후에도 어떠한 형태로든지 이어져 가고 있다 하니 오늘 하루하루의 삶이 참으로 두렵다 아니 할 수 없다.
죽지 않은 생명은 없다.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죽어 간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죽은 자의 살아 있는 목소리를 듣는 일이고, 산 자의 죽어가는 목소리를 살피는 일이다’. 죽어도 죽지 않은 이 업보의 윤회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보다 즐겁고 보람된 삶이될 것인지를 생각게 한다.
김동수 미담문학회장/시인/전라정신연구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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