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올바름'이 뭐길래…외면받은 '백설공주'

2025-04-09

디즈니가 ‘정치적 올바름(PC·Political Correctness)’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디즈니의 상징과도 같았던 첫번째 장편 애니메이션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1937)의 실사판 영화가 흥행에 참패하면서다.

지난달 19일(북미 기준 21일) 개봉한 영화 ‘백설공주’가 이달 8일까지 거둔 글로벌 수익은 1억6900만 달러(약 2500억원). 제작비로 2억7000만 달러(약 4000억원) 이상 투입한 것을 고려하면 처참한 수준이다. 국내 관객 수도 18만 명에 그쳤다. 그간 디즈니의 대표적인 흥행 실패작으로 꼽혔던 ‘인어공주’(2023)의 국내 관객 64만 명, 글로벌 수익 5억6962만 달러(약 8460억원)에도 턱없이 못 미친다.

'편견 꼬집으면 성공' 공식 깨져

구릿빛 공주의 도적 사랑 식상

개봉 3주간 국내 관객 18만 그쳐

작품성 놓치면 관객은 돌아서

사악한 여왕이 '아름다운 내면' 질투?

영화 ‘백설공주’는 인종·성별·문화 등에 따른 편견과 차별을 타파하자는 PC주의를 전면에 내세웠다. 원작에서 ‘눈처럼 하얀 피부’ 때문에 붙여졌던 공주의 이름 ‘백설’의 어원을 ‘눈보라 치는 날 태어난’으로 바꾸고 구릿빛 피부의 라틴계 배우 레이첼 지글러를 주인공으로 캐스팅했다.

영화에서 백설공주는 왕인 아버지에게서 ‘담대’ ‘공정’ ‘용기’ ‘진실’이 적힌 목걸이를 선물로 받고 시시때때로 이 네 단어를 주문처럼 되뇐다. 계모인 여왕을 격분시키는 거울의 발언도 교훈 그 자체다. “여왕님은 예쁘지만 외모에 지나지 않는다. 백설공주님은 예쁜 마음씨를 가졌다”라며 외모지상주의를 공격한다. 백마 탄 왕자 대신 도적떼 두목과 연결되는 로맨스는 왕자에 의존하는 수동적 여성상을 깨기 위한 설정이다.

영화는 이렇게 직설적으로 ‘올바름’에 집중하는 동시에 1937년 애니메이션의 왕족 중심 봉건적 세계관을 고수한다. 영국 BBC가 리뷰 기사에서 꼬집은 대로 영화는 스스로 ‘정체성 혼란’에 빠지면서 개연성을 잃고 만다. 외모에 집착하는 사악한 여왕이 백설공주의 ‘아름다운 내면’을 질투해 죽이려고 한다는 것부터 모순적인 전개다.

한때 디즈니에게 PC주의는 생존전략이었다. 정치적 올바름과 다양성에 대한 감수성이 시대적 요구로 부상하면서 기존의 수동적인 공주 캐릭터로는 대중의 공감을 끌어낼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여성 아메리카 원주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포카혼타스’(1995)를 필두로 ‘뮬란’(1998), ‘라푼젤’(2010), ‘겨울왕국’(2013), ‘모아나’(2016) 등을 통해 유능하고 적극적인 여성상을 만들어냈다. 1992년작 애니메이션을 원작으로 한 실사영화 ‘알라딘’(2019)은 의존적이었던 원작의 공주 자스민을 술탄을 꿈꾸는 진취적인 캐릭터로 각색해 10억 달러(1조4800억원) 넘는 글로벌 수익을 올렸다.

잘 나가던 디즈니의 PC 전략이 삐걱거린 건 주인공 에리얼 역에 흑인 배우 할리 베일리를 캐스팅한 ‘인어공주’(2023) 때부터다. 원작 애니메이션과 주인공 이미지가 너무 다른 데다 인어공주의 여섯 언니가 백인·흑인·동양인·아랍인이 섞여 있는 다인종으로 구성돼있어 ‘다양성 강박’이란 비판도 나왔다. 어릴 적 추억과 결부시켜 작품을 즐기고 싶어했던 관객들에게는 PC에 대한 강요로 받아들여져 불쾌감마저 유발했다.

현대 도덕 기준에선 셰익스피어도 문제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달라지는 도덕적 판단 기준으로 들여다보면 고전 명작으로 꼽히는 작품에도 논쟁거리는 많다. 16세기에 태어난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성차별·인종차별, 반유대주의적 표현 등이 문제로 지적된다. 실제 ‘베니스의 상인’의 경우 나치 정권이 샤일록처럼 돈만 밝히는 유대인들을 죽여도 마땅하다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이용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에 대한 수정 시도도 있었다. 영국의 의사였던 토마스 보들러는 1818년 셰익스피어 희곡 36편에서 ‘비윤리적’인 부분을 수정해 『패밀리 셰익스피어』를 출간한다. ‘햄릿’에서 오필리어의 죽음을 자살 대신 사고사로 바꾸고, ‘헨리 4세’에서 매춘부 캐릭터를 없애는 식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셰익스피어의 고전은 ‘패밀리’ 버전이 아닌 원전 그대로 전해지며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끌어낸다. 과거의 부조리를 비판적 시각으로 걸러내면서 당시의 사회적 맥락을 감안해 작품의 메시지를 소화할 능력이 독자에게도 있는 것이다.

최근 디즈니는 ‘라푼젤’ 실사영화 제작 중단을 결정했다. 옛 히트작을 리메이크해 원작의 인지도 덕을 보겠다는 마케팅 전략과 도덕적 이상향을 추구하는 PC주의가 서로 엇박자를 내면서 작품성을 잃어버린 ‘백설공주’의 비극 탓이다. 본질을 놓치면 관객은 돌아선다. 비단 영화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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