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년째 "북한 인권" 외친 85세 베를린 할머니

2024-10-20

1989년 11월 9일 동서독 분단의 상징이던 독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1990년 3월 독일민주공화국(동독)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자유로운 선거가 치러졌다. 그해 8월 31일 동서독 통일조약이 베를린에서 서명됐고, 10월 3일 독일은 공식적으로 통일됐다. 34년 전에 벌어진 역사적 사건이다.

베를린에 우뚝 솟은 브란덴부르크 문은 동서독 분단 시절에 공산주의 체제의 억압과 통제를 상징했다. 이 문에서 남쪽으로 약 1km 거리에 독일 주재 북한대사관이 있다. 북한 인권을 촉구하는 베를린 시민들의 자발적인 집회가 지난 2009년 9월 11일부터 매주 대사관 앞에서 열리고 있다. 처음엔 단 2명이 시작했지만, 매주 목요일 오후 2시부터 1시간 동안 진행하는 집회에 적게는 5명, 많게는 10여명이 함께한다.

대부분 50~80대 남녀인데, 전·현직 사회복지사·의료인·교사·경제학자·가수·건축가·목사 등 다양하다. 2013년 10월 김정욱 선교사를 시작으로 2014년 김국기·최춘길 선교사까지 한국인 목회자 3명이 간첩으로 몰려 북한에 납치되자 이들의 석방을 촉구하는 시위로 이어졌다.

주독일 북한대사관 앞 매주 집회

"피랍 선교사 3명 석방하라" 외쳐

악을 보고 침묵하면 그 자체가 악

집회는 성경 잠언 31장 8절('너는 말 못하는 자와 모든 고독한 자의 송사를 위하여 입을 열지니라')을 함께 봉독하면서 시작하고 구호를 외친다. "북한 기독교인들에게 자유를! 북한 주민에게 핵 대신 쌀을! 모든 주민에게 넉넉한 양식을! 모든 강제수용소 해체! 북한 주민에게 언론의 자유를! 북한 주민에게 여행의 자유를! 북한 주민의 인권 보장! 김정욱을 위한 자유! 김국기를 위한 자유! 최춘길을 위한 자유! 김일성은 신이 아니다! 김정은은 핵폭탄과 미사일을 멈춰라!" 참가자들은 피켓과 확성기를 들고 독일어와 영어로 구호를 수차례 외친다. 매번 찬송가를 부르며 집회를 마무리한다.

16년째 이 집회를 이끄는 게르다 에를리히(85) 할머니와 연락이 닿았다. 동독 출신으로 베를린 장벽과 약 400m 거리에서 살았다는 그는 북한의 종교 탄압 실상을 폭로한 강연을 듣고 마음에 와 닿아 행동에 나섰다고 한다.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 정권의 끔찍한 강제수용소 만행을 기억하는 그는 탈북자의 강제수용소 증언을 접하면서 북한 인권에 관심을 갖게 됐다.

북한대사관 직원들이 "당신들의 행동은 무의미하다"며 협박하고 집회 사진을 촬영해 독일 외교부에 항의했지만, 지금껏 흔들림 없이 합법 집회를 계속해왔다. 할머니는 "기독교적 자선과 정의감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을 뿐"이라고 겸손해했다.

1972년 독일로 갔던 파독 간호사 이명숙(75)씨는 한국인 중에 유일하게 집회에 동참하고 있다. 14년째 베를린에 거주하는데 "타국민을 위해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라는 마음으로 북한 인권 활동에 충실한 독일분들에게 감동했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에를리히 할머니는 지난해 암 진단을 받고 수술까지 했지만, 다행히 암을 잘 극복해 지금도 집회를 이끌고 있다.

김정욱 선교사의 형 김정삼(63)씨는 "1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동생의 생사 확인과 송환을 위해 노력하는 독일 베를린 시민들의 사랑과 은혜에 큰 위로가 된다"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일면식도 없는 피랍 한국인 선교사들과 박해받는 북한 주민들을 위한 베를린 시민들의 용기 있는 행동을 보면서 숙연해진다. 2016년 북한인권법을 제정하고도 아직 북한인권재단을 출범시키지 않고 있는 국회의 직무유기를 생각하니 부끄러울 따름이다.

김영호 통일부 장관은 지난해 11월 에를리히 할머니께 보낸 편지에서 "'악을 보고도 침묵하는 것은 그 자체가 악이다'라고 했던 디트리히 본회퍼(1906~1945년) 목사의 정신을 보여주신 여러분께 깊은 존경과 감사를 표한다"고 했다. 김 장관은 시위 참가자 13명에게 일일이 이름을 새긴 목도리를 지난해 성탄절 선물로 보냈다.

북한이 남북 관계를 '교전 중인 적대적 두 국가'로 선언하면서 남북통일에 먹구름이 끼었다는 소식을 전하자 에를리히 할머니는 이렇게 회신했다. "독일 통일을 되돌아보면 1989년 1월 19일 당시 동독 국가원수 에리히 호네커는 베를린 장벽이 100년 동안 더 서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그로부터 10개월도 안 돼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독일은 통일됐어요. 예측할 수 없는 일이 하나님 말씀에 따라 이뤄졌습니다. 한국의 민주 정부 아래에서 통일이 이뤄지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비폭력 투쟁과 모든 방법을 활용해 통일을 위한 노력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다면 기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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