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월 20일은 장애인의 날이었다. 이날을 맞아 전국 각지에서 기념 행사와 집회가 열렸고, 프로 스포츠에서도 장애인과 함께 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대한장애인체육회 역시 국제 캠페인 ‘WeThe15’를 실천하고 있다. ‘WeThe15’는 전 세계 인구 약 15%가 장애를 갖고 있음을 뜻한다. 이때 장애는 시각장애나 지체 장애뿐 아니라 고혈압, 당뇨, 우울증, 노화 등도 포함된다. 즉, 누구나 잠재적 장애인이라는 선언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장애’를 ‘타자화’하고 있다. 보호와 시혜, 감동과 영웅담 속에 장애인을 가두고 있는 건 아닌가. 그동안 자주 사용해온 몇 가지 표현과 관행을 되짚어보며, 장애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부터 바꿔야 할 시점이다.

장애인 관련 기사나 방송에서 흔히 등장하는 표현이 있다. “장애를 극복하고 기적을 이뤘다”, “장애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다” 등이다. 이처럼 장애를 극복의 대상, 감동의 서사로 소비하는 방식은 장애 당사자들 사이에서 오히려 불편하다는 반응을 낳는다. 장애는 대부분 평생 안고 살아가는 ‘상태’다. 이는 단기간 노력이나 의지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며, 불편을 감수하며 살아가는 일상의 일부다. 업적을 이룬 장애인이 있다면, 그의 노력과 성취에 집중해야지, ‘장애를 극복했다’는 틀에 끼워 감동의 상품으로 소비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장애인을 배려합시다”라는 문구는 선의에서 나왔지만, 그 자체로 차별이라는 지적도 있다. 인간은 누구나 서로를 배려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런데 굳이 장애인을 특정해 배려의 대상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비장애인이 주체, 장애인이 객체’라는 위계를 전제하는 말이 될 수 있다. 배려는 동등한 존재끼리 오가는 존중의 행동이지, 위에서 내려주는 혜택이 아니다.
장애를 ‘비정상’이라고 표현하는 사람은 이제 드물지만, 여전히 무심코 쓰이는 차별적 언어들이 있다. ‘벙어리’, ‘장님’, ‘절름발이’ 같은 직접적인 표현부터 ‘눈먼 돈’, ‘장님 코끼리 다리 만지기’ 같은 관용어까지, 우리 일상에는 장애를 희화화하거나 결손으로 낙인찍는 표현이 남아 있다. 심지어 ‘장애우’처럼 한때 순화된 표현으로 여겨졌던 단어조차도 지금은 당사자의 동의 없이 만들어진 낱말로서 사라져야 할 표현이 됐다.

장애인과 일상에서 마주쳤을 때,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은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그러나 그 도움조차도 먼저 ‘동의’를 구해야 한다. 휠체어를 무심코 밀거나, 시각장애인의 팔을 갑자기 잡는 행위는 당사자를 불편하게 만들 수 있다. 휠체어, 지팡이, 안내견은 장애인의 신체 일부와 같다. 그들의 공간과 몸을 존중하려면, 동의를 구하지 않은 도움보다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방식으로 돕는 ‘동의 기반 배려’가 우선돼야 한다.
패럴림픽과 아시아파러게임 같은 장애인 스포츠 이벤트가 열릴 때마다 우리는 “장애를 이겨낸 영웅”을 칭송한다. 그러나 대회가 끝나면 그들의 존재는 ‘투명인간’이 된다. 장애인 선수들이 원하는 것은 과도한 찬사도, 동정도 아니다. 사람 대 사람, 선수 대 선수로서 평등한 시선이다.
장애는 일부 소수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고령화, 질환, 사고 등 누구든 예기치 못한 순간에 장애를 겪을 수 있다. 우리는 이미 ‘진행성 장애’를 가진 존재다. 장애인을 위한 사회 시스템은 결국 미래의 나 자신을 위한 것이다. 배리어프리 환경, 포용적 교통과 노동, 함께 쓸 수 있는 공공시설은 특혜가 아니라 상식이 되어야 한다.

장애인의 날에 우리가 진심으로 돌아봐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장애인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내가 사용하는 말과 행동은 정말 평등한가.”
우리는 그 답을 말이 아닌 일상에서, 행동으로 보여줘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