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 우리 정치는 오징어 게임을 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선풍적 인기를 끌며 한국 문화를 전 세계에 알린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두 번째 시즌이 작년 말 공개돼 다시 수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렸다.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 선포와 중첩된 <오징어 게임 2>는 우리 정치의 야만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시즌 1은 엄청난 재정적 어려움을 겪는 456명의 참여자가 목숨을 걸고 위험한 일련의 어린이 게임을 하여 참가자 한 명당 1억원씩 총 456억원의 상금을 얻기 위한 서바이벌 스릴러 게임이었다. 어린이의 즐거운 게임을 살벌하고 야만적인 생존 게임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무엇이든 이 드라마는 자본주의의 사악한 논리를 비판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오징어 게임>은 자본주의의 최대 문제점으로 거론되는 사회적 불평등과 양극화를 직접 건드리지 않는다. 이 드라마가 세계적으로 흥행했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의 보편적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오징어 게임>은 오히려 자본주의가 한국적으로 어떻게 왜곡되는가를 민낯으로 보여준다. 최후의 승자가 모든 것을 다 가져간다는 승자 독식의 논리는 단지 드라마의 외면적 장치에 불과하다. 돈이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배금주의’,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지고 삶의 벼랑 끝에 서 있으면서도 스스로 노력하기보다는 일확천금으로 해결하려는 ‘빈곤 문화’, 그리고 게임의 참여가 강요된 것이 아니라 자발적이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는 ‘그릇된 공정성’은 천박한 자본주의가 한국에 들어오면 얼마나 더 극단적으로 천박해지는가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오징어 게임’은 드라마보다 훨씬 더 드라마 같은 우리의 현실이다. 약속한 것처럼 게임이 진행되고, 약속한 상금을 지불하고, 어떠한 강압도 없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게임은 겉으로 매우 공정한 것처럼 보이지만, 모든 패자를 죽음으로 내모는 게임 과정 자체가 비인간적이고 야만적이다. 참가자는 임의로 게임을 중단할 수 없으며, 게임을 거부하는 자는 탈락으로 처리한다는 게임의 규칙은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는 한 그 체제의 논리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분명히 말해준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게임의 세 번째 규칙이다. “참가자의 과반수가 동의할 경우 게임을 중단할 수 있다.” 다수결의 원리에 따라 야만적인 게임을 중단할 수 있다는 이 조항은 마치 자본주의를 통제할 수 있는 ‘민주적’ 장치처럼 보인다.
오징어 게임이 우리의 정치 현실
‘다수결’은 민주적 의사 결정의 핵심 원칙이다. 다수가 원하는 것은 결국 전체가 원하는 것이 된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같은 어린이 놀이를 시키면서 사람을 죽이는 데스게임의 야만성을 경험한 사람들은 게임 중단을 요구하지만, 설령 민주적 투표로 게임이 중단된다고 해도 다시 돌아간 바깥의 사회 현실은 잔혹한 게임장보다 더 지옥 같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게임을 하든 하지 않든 똑같은 지옥을 마주한다면, 민주주의의 다수결 원칙은 야만적인 현실을 정당화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오징어 게임>은 이렇게 허울만 민주주의인 우리 정치의 야만성을 폭로한다. <오징어 게임 시즌 2>에서는 다수결의 문제점이 전면에 등장한다. 시즌 2에서는 게임이 끝난 이후 투표가 진행되고, 투표를 통해 게임이 중단하면 남은 생존자끼리 누적 상금을 나눠 갖도록 변경되었다. 게임 참가자들은 결국 게임의 속행을 지지하는 ‘O’의 진영과 게임 중단을 원하는 ‘X’의 진영으로 분열되어 생사를 건 싸움을 한다. 과반수를 차지하기 위한 설득과 협박, 폭력과 살해의 과정은 그 자체 다수결 원칙에 내재하는 폭력성을 드러낸다. ‘O’ 진영과 ‘X’ 진영 사이에는 어떤 대화와 타협도, 토론과 논의도 존재하지 않는다. 서로 죽고 죽이는 것이 게임 주최 측이 의도한 목표이며, 싸울 목표는 참가자들이 아닌 주최 측이라 강조하는 주인공의 말은 공허하게 들린다.
우리 정치는 지금 정권이라는 상금을 건 서바이벌 게임을 하고 있다. ‘오징어 게임’이 우리의 정치 현실이다. 윤석열의 계엄령 선포와 그로 인한 정치적 혼란은 ‘다수결 원칙’의 문제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다수결 제도는 합리적으로 사용하면 민주적 질서와 안정을 가져다주지만, 비합리적으로 오용되면 사악한 정치를 더욱더 폭력적으로 만든다. 우리가 선거를 통해 선출한 국회의원들로 구성된 여당과 야당은 ‘정권’이라는 상금을 얻기 위해 게임을 한다.
공정한 게임을 위한 규칙은 대체로 세 가지다. 첫째, 게임 참가자는 상대방을 제거해야 할 적이 아닌 경쟁자로 대해야 한다. 둘째, 어떤 결정을 다수결로 하더라도 소수의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 셋째, 참가자의 과반수로 게임의 규칙을 변경할 때도 앞의 두 가지 규칙이 유지될 수 있어야 한다. 공정한 정치 게임은 자신이 살기 위해 상대방을 죽이는 데스게임이 아니다.
우리의 정치 게임은 지금 어떤 모습일까? 우리의 정치 게임이 사악하고 폭력적인 ‘오징어 게임’을 닮았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계엄이라는 수단을 통해 게임의 규칙을 폭력적으로 변경하려고 시도하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법률적 절차만 남았을 뿐 계엄의 불법성과 위헌성은 분명하다. 문제는 윤석열 이후이다. 계엄령은 야당의 입법 독재의 심각성을 일깨우기 위한 ‘계몽령’이었다는 윤 대통령의 주장은 어처구니없는 궤변이지만, 계엄 사태로 드러난 다수결 정치의 야만성은 여전히 사실이다. 계엄의 문제점과 그 부당함을 인식하면서도 국민이 탄핵 찬반의 ‘O’ 진영과 ‘X’ 진영으로 나뉘어 싸우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잘 말해준다.
다수결 정치의 문제점 인식해야
문제는 계엄을 가져온 우리 정치의 구조와 문화이다. 어느 정치인을 악마화하여 제거한다고 해서 정치판이 좋아지지 않는다. 어떤 정치인이 중도를 장악하기 위해 온갖 변장술로 치장한다고 해서 새로운 정치가 시작되지 않는다. 물론 사회가 바뀌면 사람도 바뀌어야 한다는 말처럼 그 정치인이 정말 변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국민은 알고 있다. 지금의 ‘오징어 게임’을 중단하고 새로운 정치를 시작하기 위해 게임의 규칙을 바꾸지 않는 한 서로 죽이는 데스게임이 계속된다는 것을.
우리는 제왕적 대통령제와 여소야대의 입법 독재가 기형적으로 결합한 ‘87 체제’를 개선해야 한다. 대통령도 우리가 직접 뽑은 선출직 권력자이고, 대통령을 탄핵한 국회의원도 국민을 대변하라고 직접 뽑은 대리자이다. 우리는 대통령을 직접 뽑으면 민주주의가 실현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87 체제’의 출발점이고 동시에 문제점이다. 링컨의 명언처럼 민주주의는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를 추구한다. 우리는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직접 뽑는다는 점에서 모든 정부는 ‘국민의 정부’이다. 문제는 국민을 위해 권력을 행사하는 정부가 정말 ‘국민에 의한 정부’가 되려면, 국회는 실제로 민의를 있는 그대로 대변해야 한다. ‘오징어 게임’의 ‘O’ 진영과 ‘X’ 진영의 숫자가 50 대 50이라면, 이를 대변하는 대리인의 수도 본래는 50 대 50이어야 한다. 그러나 1표라도 많은 사람이 당선되는 승자 독식의 소선거구제에 기반한 우리의 선거 제도는 국민의 의사를 왜곡한다. 이러한 구조를 바꾸지 않는 한, 우리 정치는 부패하고 타락한 다수결 정치에 기반한 ‘오징어 게임’이 될 수밖에 없다.
윤석열 이후의 정치를 정말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천박한 다수결 정치의 문제점을 인식해야 한다. 다수결의 핵심 문제 중 하나는 입법 다수결을 확보한 정당이나 연합이 입법권을 효과적으로 독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다수 정당은 소수의 관점을 소외시키면서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는 법률을 통과시킬 수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 다수결은 통합을 촉진하기보다는 분열을 심화시킨다. 다수가 내린 결정은 사회 내의 다양한 관점을 대표하지 못해 정치적 소외와 민주적 기관에 대한 신뢰 감소로 이어질 수 있다. 왜냐하면 정치적 의사 결정은 의미 있는 토론보다는 주로 수적 우월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실질적인 토론에 참여하는 것보다 표를 확보하는 데 중점을 두면 민주주의의 심의적 측면이 훼손된다. 따라서 정치 행위자들은 다수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종종 선전과 선동, 허위 정보와 가짜뉴스에 의지한다. 이런 ‘오징어 게임’의 다수결 정치가 계속된다면, 우리에겐 희망이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