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제작일지] 영화 <반구대 사피엔스>, 다큐멘터리 <반구대별곡> “ (26) 사막과 늪 사이”

2025-03-06

13주 만에 나는 사막이 되었다.

13주 만에 제작일지다. 3월부터는 뭔가 본격적으로 일이 시작될 줄 알고 연재를 재개하려 했는데, 딱히 별 변화가 없다. 제작비는 동결돼도 스태프들은 분주하게 움직이지만 어쨌든 자금이 돌아야 가시적인 성과가 있는 거니까. 굳이 소식이 있다면 프로듀서가 내 두 작품 모두 중국, 베트남, 일본 배급을 끌어냈다는 정도. 물론 기쁘지. 하지만 영화가 완성이 돼야 손에 잡히고 피부로 느끼는 일인 거다.

작년 한 해는 반백 년을 살아오며 인생의 절반 이상을 영화와 연을 놓지 않은 입장에서 모든 걸 다 뒤엎어버린 시간이었다. 나는 사막이 되었다.

예술인과 경영인의 사이

지원사업의 희망과 절망 사이

영화사에서 일할 땐 몰랐던 많은 일이 의도하지 않게 제작자를 겸하고 보니 창작자로서 예술인으로서 부르짖었던 수많은 불만과 외침들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공허한지 깨달았던 해였다. 나 자신도 예술과 경영 사이에서 그토록 고통스럽고 갈등의 연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데 영화산업과 영화생태계의 그 수많은 군상은 말할 것도 없을 테다.

지원사업이라는 게 얼마나 희망적이면서도 절망적인지 알게 됐다. 구체적으로 일을 진행할 수 있으니 희망적이고, 돈이라는 아수라에 잠식되어 발버둥을 칠수록 끝없는 어둠 속으로 침잠하므로 절망적이다. 우유부단한 예술인이 경영이란 걸 하면 그렇게 된다. 모질지 못하고 냉정하지 못해서 그렇게 호구가 된다.

호구와 비겁

수많은 결정의 순간에서 남들이 하지 말라는 길만 온 것 같다. 그게 내 삶의 철학이고 신의성실이며 의리이자 예술이라고 생각했다. 하지 말라고 가지 말라고 만류하는 게 인간 같지 않게 비정한 짓이라고 생각했고, 그런 이들이 이간질이나 하는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널 위해서, 작품만 위해서, 라고 하는 말들이 모두 공염불인 줄 알았지. 그렇게 여겨야 우유부단하고 미련한 내 마음이 좀 편했다.

생각해 보면 하나부터 열까지 내 잘못이다. 어느 지원사업의 중간평가 때 서류에 솔직하게 애로사항을 쓰라고 해서 있는 그대로 썼더니 엄청난 비난을 받았고, 반박하다가 모든 결정은 당신이 내렸지 않았냐, 라고 하길래 입을 다물어버리고 말았다. 그 말보다 더 정확한 말이 없다는 걸 내내 느끼면서도 내내 잘못된 판단을 해 왔다.

아마도 겁이 났기 때문일 거다. 지방 가득한 똥배도 내 몸이라고 다칠까 봐 몸 사리듯이 냉정하고 단호하고 이기적이지 못한 이유가 한 발 더 내딛는 게 불안해서였을지도 모른다. 누구도 다치는 걸 원하지 않아서 결국은 나를 난도질하고 말았다. 참고 참으며 참다가 버럭 화를 내는 건 결국 모자라고 못난 나에게 화를 낸 것이었다.

그래도 뚜벅뚜벅 걸어가야지. 어느 절벽 앞에서 아, 길을 잘못 들었네, 확인하고 뒤돌아가게 될지 모르겠지만, 저 바로 앞에 절벽이 있어, 하고 말리는 사람이 많았어도 그 절벽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확인하고 돌아서도 돌아서야지. 그런 의미에서 나는 절벽에서 떨어진 뒤 피딱지를 시원하게 떼 내는 중이다.

드디어 작가를 구했다

그럼, 이제 기분을 환기해서. 며칠 전에 작가를 채용했다. 정직원이다. 업무에 과부하가 걸려 나 자신을 돌볼 겨를이 없고, 내 작품을 다듬을 짬이 없고, 내 논문을 신경 쓰지 못하고, 무엇보다도 내 부모에게 친절하지 못하고, 내 개들에게 다정하지 못했다. 그래서 작가를 들였다.

제법 오랫동안 봐온 친구다. 울산에서 드물게 영화를 전공했고, 공모전 당선으로 실력이 검증됐으며, 몇 가지 고비를 넘기면서 성실함과 지구력도 확인했다. 첫날부터 시나리오를 만지려고 했는데 잡무가 많아 이 친구, 생전 해보지 않았던 일부터 시작했다. 그래도 이유식을 넙죽넙죽 잘 받아먹는 어여쁜 아기처럼 과제가 넘어가면 정해진 시간에 결과물이 넘어온다.

학생들을 가르칠 때 정해진 시간에 과제 규칙을 준수하지 못하면 감점했다. 나도 완성되지 않은 걸 내는 게 싫으니까. 그런데 대학원에서 난 잘해보겠다고 시간을 못 맞춰서 며칠 뒤에 냈다가 감점을 받았는데, 누군가가 일단 대충 써서 기한 내에 제출하고 시간이 제법 많이 흐른 뒤에 수정해서 제출한 뒤에 담당 교수와 더 친해진 걸 본 적이 있다. 나름대로 충격이었다.

그 뒤로 이상한 버릇이 생겼다. 학생들 과제를 제때 확인하지 않았다. 기말고사 후에 냈나 안 냈나만 확인했다. 그게 원래인 양 습관이 됐을 무렵 나도 과제의 질을 따지지 않았고, 성실성의 기준이 날짜를 맞췄냐 아니냐가 돼버리고 말았다. 모든 순간에 그랬던 것은 절대 아니지만.

이젠 나도 모르겠다. 늦어도 제대로 된 걸 제시하는 게 바람직한지, 텅텅 비어 있어도 시간 맞춰 일단 제출하는 게 맞는 것인지. 어쨌든 텅텅 빈 걸 늦게 제출하거나 아예 하지 않는 것보다야 뭐가 되든 낫겠지. 그런 면에서 내 작가는 제법 괜찮은 걸 제때 제출한다. 그러니 일단 지금은 올해 최대의 수확이 아닐까 한다.

새로운 시도 두 가지

그러나 아직은 비밀

올해는 새로운 시도를 두 가지 해볼 생각이다. 아직은 비밀이다. 입이 근질근질해서 한 가지만 말하자면, 울산은 영화 불모지다. 이런저런 영화제를 한다고 세금을 제법 많이 쓰고 있고, 이런저런 영상 교육과 영상 관련 단체가 있긴 하다만 어쨌든 분명한 것은 척박하다는 사실이다. 정책이 없고, 관련학과가 없으며, 그래서 기반이 형성되지 않고, 따라서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전혀 없진 않다. 있긴 있지. 다만 산업으로 형성되기에 턱없이 부족할 뿐이다. 내가 시도하는 새로운 작업은 이런 울산에서도 시도가 가능하다. 두고 봐라. 내가 보여줄 테니까. 딱 한 번만. 내가 두 번 할 일은 아니니까. 그리고 젊은 친구들이 그 맥을 이어갔으면 좋겠다. 그래서 그걸로 울산의 영상산업 형성과 활성화에 기반이 되기를 바란다.

프로듀서, 울산에 오다

어젯밤에 프로듀서로부터 연락이 왔다. 오늘 영화 배급과 관련한 일로 후쿠오카에 가기 위해 부산에 왔다고 했다. 그런데 3주 후에도 가야 해서 꼭 가지 않아도 된다면 울산으로 넘어와 <반구대 사피엔스> 얘기를 하잔다.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이 영화에 대해 조급한 마음이라고.

반구대가 어디고 어떤 곳인지, 선사시대 유물이 있는 곳인지도 몰랐던 사람들이 울산, 반구대, 반구천암각화를 폭풍 검색했던 거다. 그리고 매료된 거다. 조금 민망하지만, 영화판에서 내 평판이 나쁘지 않다 보니 나와 일하고 싶은 것도 제법 큰 이유라고 했다.

배우들과 스태프들은 SNS 활동을 굉장히 열심히 한다. 서로 확인하고 서로 확인받기 위해서. 그리고 표현해야 하는 직업을 가졌으니까. 그런 자들이 그들의 SNS를 통해 마구 퍼 나를 울산과 반구대와 암각화를 기대한다. 얼른 시나리오를 마음에 쏙 들게 정리해서 빨리 스토리보드를 만들고 현장에서 펄펄 날아다니고 싶다. 그렇다면 이 뱃살이 줄어드는 속도만큼 기분이 훨훨 날아다닐 듯 행복할 것 같다.

새로 태어나는 내 작업실

새로 오고 가는 사람들

처음 집을 지을 때 내 작업실은 창고였다. 코로나 시국쯤에 울산 사람들과 교류를 시작하면서 내 작업실은 놀이터가 됐다. 드나드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니 엉망진창인 물건들을 보관하느라 공간을 구분해 좁은 장소가 됐다. 어제 그 벽들을 모두 깼다.

가벽이 서 있던 자리는 바닥 데코타일이 흉하게 벗겨졌다. 난 괜찮은데 일을 진행하는 사람이 너무 힘들어 보여서 미안했다. 그래서 괜히 앞에도 없는 사람에게 뭐 이렇게 힘들게 해놨냐며 쌍욕을 해버렸는데, 그걸로 괜히 속상해하진 않았는지 모르겠다. 오늘 미안하다고 말해야겠다.

이번 한 주도 잘 마감하고 다음 주에는 다시 신명 나게 전진할 수 있기를.

이민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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