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에게
그곳을 떠나오던 날이었어요. 맑게 갠 하늘을 보고 출발해 톨게이트를 벗어난 지 십 분도 채 되지 않았는데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가 자욱하게 고속도로를 점령하고 있었어요. 주말이라 차량이 제법 많았는데 모든 차들이 거의 저속의 상태로 비상등을 켰죠. 뒷차가 멈추지를 않으니 가야 하는데 저 앞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른 채 멈출 수 없는 상태로 달리는 공포감을 오랜만에 느꼈어요. 다행히 얼마 가지 않아 안개의 무리는 사라지고 거짓말처럼 파란 하늘이 화창해지더라고요. 내가 그렇게도 좋아하는 안개가 그토록 치명적이라니 환희와 나락을 함께 가진 사랑과 닮지 않았나요. 다녀오고 난 후 한 치 앞의 일도 알 수 없는 이 고단한 생을 우리 모두는 참 잘 살아내는구나, 선배에게 안부가 오고서야 우리가 함께 겪었던 어느 아침 산책길이 떠오르더군요.
늦가을 마른 산국의 향이 그리워 차를 몰고 나간 아침. 대신 길 끝에서 이른 아침이라 문을 열지 않은 목장을 만났지요. 멀리서 양들이 선 채로 머리를 숙이고 미동이 없었어요. 나는 그들이 잠을 자는 것이라고 했고 선배는 양이 쉬지 않고 풀을 뜯는 것이라 했지요. 풍성한 목초지를 놔두고 척박한 풀 위에 경계선을 치고 양들을 몰아두는 걸 본 적이 있는데, 그건 양이 먹는데 정신이 팔려 배가 터져 죽을 수도 있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고 하면서요. 가혹한 소설 같은 이야기라 사실인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왠지 시인의 말은 세상 밖의 언어라는 생각이 들어 믿기로 했다. 그 환장할 레이스에 우리의 속도로 가는 수밖에요. 돌아온 후 선배는 마종기의 파타고니아의 양이라는 시를 제게 보내주었어요.
파타고니아의 양/ 마종기// 거친 들판에 흐린 하늘 몇 개만 떠 있었어./ 내가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 해도/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것만은 믿어보라고 했지?/ 그래도 굶주린 콘도로는 칼바람같이/ 살이 있는 양들의 눈을 빼먹고, 나는/ 장님이 된 양을 통째로 구워 며칠째 먹었다.// 어금니 두 개뿐, 양들은 아예 윗니가 없다./ 열 살이 넘으면 아랫니마저 차츰 닳아 없어지고/ 가시보다 드센 파타고니아 들풀을 먹을 수 없어/ 잇몸으로 피 흘리다 먹기를 포기하고 죽는 양들.// 사랑이 어딘가에 존재할 것이라고 믿으면, 혹시/ 파타고니아의 하늘은 하루쯤 환한 몸을 열어줄까?/ 짐승 타는 냄새로 추운 벌판은 침묵보다 살벌해지고/ 올려다볼 별 하나 없이 아픈 상처만 덧나고 있다./ 남미의 남쪽 변경에서 만난 양들은 계속 죽기만 해서/ 나는 아직도 숨겨온 내 이야기를 시작하지 못했다.
다시 선배가 몽골 초원에서 바라보았던 아름다운 유채평원을 보고 왜 마종기의 시를 떠올리던 선배의 시선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양/ 김인자// 달리는 차를 세웠지/ 온통 노랗과 초록물결인 몽골 초원/ 그렇게 광활한 유채평원은 처음이었어/ 양떼들은 거친 곳에 모여 풀을 뜯었지/ 철조망 하나만 넘으면 풍요의 땅인데/ 주인은 왜 양에게 경계 밖을 고집하는 걸까/ 그때 누군가 알려 주었어/ 저 풍요로운 풀밭에 풀어놓으면/ 양들은 허겁지겁 성찬에만 눈이 뒤집혀/ 배가 터져 죽게 된다고/ 먹어도먹어도 허기지는 메마른 풀밭에 두는 건/ 오직 배 터져 죽는 걸 막기 위해서라고/ 사람이 가까이 가도 꿈쩍 않고 풀만 뜯는 양을 보며/ 굶주린 콘도르가 살아있는 양의 눈알을 빼먹고 나면/ 눈을 잃어 장님이 된 양을 통째로 구워먹었다는/ 마종기의 시인의 ‘파타고니아의 양’이 생각났지/ 양떼도 날이 저물면 별자리를 보고/ 집을 찾아간다는 말은 믿기지 않았지만/ 전날 내가 손가락을 빨며 배부르게 먹은 고기도/ 배가 터져서 죽은 슬픈 운명의 양은 아니었을까/ 먹이다툼으로 살생이 일상이 되어버린 인간계/ 양의 눈알을 노리는 굶주린 파타고니아의 독수리와/ 배 터져 죽은 몽골의 양과 그 양고기를 먹는 사람들/ 그날 이후 나는 양을 볼 때마다/ 불룩한 눈알과 배를 보는 버릇이 생겼지/ 그것이 슬픔인지 기쁨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내게도 첫날처럼 시작 못한 이야기가 있긴 있었지
예기치 못한 순간으로 놀랐던 일도 있었지만 잊지 못할 시간도 있었답니다. 그곳에서는 익숙하면서 자주 가는 곳의 숲을 산책하지만 이루 말할 수 없는 경이로움도 있었어요. 새들이 떠나고 텅 빈 겨울 전나무 숲이었던가요. 큰 도로에서 얼마 멀게도 걷지 않았는데 ‘새로운 고요’에 대해 알게 되었어요. 그 길을 내가 걷는데 마치 나무가 나를 지나가는 것 같은 시선의 전환과 함께요.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고 다만 내 몸뚱이만 공기를 밀고 나가는데 그 빈 공간에 빼곡이 채워지는 고요. 선배가 옆에서 말을 하고 내가 대답을 하는데도 마치 묵음으로 묻혀버린 고요. 돌아와 선배와 보냈던 시간을 되돌려 복기하면서 그 고요를 밀고 가는 우리의 속도가 완벽하게 닮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언제나 그랬듯이 다녀오고 한참이 지나서야 이제 사진 파일을 열어봅니다. 여전히 그곳에 머물고 있는 듯 일어나 아침부터 산책 그리고 나눈 이야기와 음식들 선명하게 복기할 수 있는 시간을 갖고 글을 쓰는 일이 제게 여행의 마무리랍니다. 그때는 풍경에 빠져 보지 못했던 흐르는 감정과 나를 둘러싼 자연들이 고요로 내게 말해주는 것들, 되짚어가는 속도는 아마 여행했던 시간보다 훨씬 길지 않을까 해요. 다시 되돌아가기를 반복하고 빠뜨린 것이 없나 발아래를 살피고 그렇게 우리의 생의 속도도 상상으로 조절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곳에도 눈이 오고 2024년 12월이 갑니다. 남도의 호텔을 예약하고 짐을 챙기던 얼마 전 밤, 두 눈으로 믿을 수 없는 비상계엄령을 뉴스에서 보았어요. 짐을 풀고 사건의 추이를 지켜보며 잠을 설치고 있는지 일주일이 다 되어갑니다. 파타고니아의 양이 떠오르는군요. 국민들은 지금 모두 이렇게 집단 우울을 겪고 있습니다. 다행인 것은 젊은 청년들의 축제 같은 혁명을 연출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합니다. 차고 시린 겨울 강도 곧 꽃이 피고 봄이 오면 저 깊은 곳에서부터 녹기 시작하겠지요. 고요와 느림의 속도를 아는 사람들이 욕심부리지 않고 함께 사는 2025년을 꿈꿔봅니다. 어수선한 시국이지만 다정함을 잃지 않는 연말 보내시기 바랍니다, 선배.
최영실 포토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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