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밥상] 부드러운 홍어애와 보리싹의 궁합…먹을수록 ‘중독적인 맛’

2024-12-11

호남지역에는 ‘게미가 있다’는 말이 있다. ‘깊고 독특한 음식 맛’ ‘씹을수록 고소하고 입맛을 당기는 맛이 있다’는 뜻의 방언이다. 전남 나주 영산포의 ‘보리애국’은 숙성 홍어 애(간)와 살을 보리 새싹과 함께 끓여낸 향토음식이다. 숙성한 홍어 특유의 냄새와 구수한 국물은 추운 날 더욱 게미가 있다.

가오릿과 바닷물고기인 홍어는 마름모꼴에 폭이 넓고 위아래가 납작한 몸통을 가졌다. 몸집에 비해 작은 주둥이와 지느러미가 특징이다. 홍어는 암컷과 수컷이 육안으로도 구분된다. 홍어 수컷은 꼬리 옆에 생식기가 두개 붙어 있으며 날개에 가시가 있지만 암컷은 꼬리가 하나이고 날개에 가시가 없다. 암컷은 수컷보다 크기가 크고 오독오독 씹는 식감이 좋아 값이 더 비싸다. 홍어 살이 차는 시기는 산란기인 11월부터 이듬해 이른 봄까지다. 봄이 시작되면 서서히 살이 빠지기 시작하니 진달래꽃이 피기 전에 홍어를 먹어야 한다는 옛말도 있다. 홍어는 국내 모든 연해의 수심 20∼100m에 서식하는데 국내산 홍어는 주로 인천 옹진군 대청도나 전남 신안 흑산도에서 잡아 올린다. 특히, 흑산도에서 잡히는 홍어는 참홍어로, 깊은 곳에 서식하며 크기가 일반 홍어보다 크고 주둥이 끝이 뾰족하다.

옛날 호남지역에선 겨우내 곡식이 떨어지고 먹을 게 넉넉지 못한 시기에 아직 다 자라지 않은 보리 싹을 캐어 끓인 보릿국으로 배고픔을 달래곤 했다. 흔히 냉이 등의 나물을 함께 넣는데 나주에선 홍어 애를 넣어 보리애국을 만들어 먹었다. 조선시대 정약전은 흑산도 유배생활 중 집필한 해양생물학 서적 ‘자산어보’에서 홍어 요리에 대해 언급하며 “배에 복통이 있는 사람은 삭힌 홍어로 국(홍어애국)을 끓여 먹으면 더러운 것이 제거되며 술기운을 없애는 데 매우 효과가 있다”고 기록했다.

홍어가 전남을 대표하고 나주 영산포가 삭힌 홍어의 본고장이 된 이유는 뭘까. 여러 가지 설을 종합해보면 흑산도에서 잡은 홍어를 가까운 육지인 영산포로 실어 왔는데 열흘에서 보름 정도 걸리는 뱃길로 오는 동안 홍어가 상해버리기 일쑤였다. 이 때문에 삭히기 시작한 홍어가 갓 잡은 홍어보다 감칠맛이 좋아 먹게 됐다는 것이다. ‘자산어보’에 “나주 가까운 고을에 사는 사람들은 삭힌 홍어를 회·전·국 등으로 즐겨 먹는다”는 기록이 있는 걸로 미뤄 보아 나주에서 홍어가 잡히진 않지만 삭힌 홍어 요리는 어느 지역보다 잘 발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이야 전국에 알려진 삭힌 홍어 요리지만 홍어 좀 즐긴다는 이들은 겨울철이 되면 유난을 떨며 숙성 홍어의 본고장인 나주 영산포를 찾는다. 영산강 뱃길을 따라 올라와 닻을 내리던 영산포구가 있던 자리에는 홍어를 파는 식당과 도매상이 모인 영산포 홍어 거리가 형성돼 있다. 홍어 거리에 들어서면 쿰쿰한 숙성 홍어 냄새가 풍긴다. 영산교 건너에 있는 식당 ‘홍어1번지’(사장 안승권)는 3대째 이어지는 홍어 전문점이다. 식당에선 15∼25일 삭힌 홍어를 사용한다. 홍어 애는 크기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보통 한마리에 600g 정도만 나오는 귀한 부위다. 안승권 사장은 보리애국을 끓이는 시간이 최소 6시간 이상이라고 설명한다.

“우선 홍어 뼈를 4∼5시간 푹 끓여서 육수를 낸 후 된장을 풀고 보름 정도 삭힌 홍어 날개 살과 홍어 애, 고추, 시래기, 보리 싹을 넣어 끓여요. 이때 보리 싹은 한번 삶아서 넣어야 질기지 않고 부드러워요. 보리애국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일주일에도 세번씩 찾아 먹을 정도로 중독적인 맛이죠.”

숙성하지 않은 홍어 애와 껍질을 시작으로 홍어 무침·탕수육·삼합·튀김·전·찜이 차례로 나온다. 뒤로 갈수록 오래 숙성했을 뿐만 아니라 열을 가해 홍어 특유의 향이 더 세다. 입 안이 아리다 싶을 때쯤 보리애국이 뚝배기에 담겨 나왔다. 추어탕 같은 모양이지만 독특한 홍어 냄새에 된장과 보리 싹이 섞여 구수한 냄새가 난다. 콧구멍이 뻥 뚫리는 맛보단 부드럽고 기름기 있는 홍어 애가 국물에 녹아들어 묵직하다. 국에 밥을 말면 녹진한 국물에 밥알이 스며들어 부드럽게 넘어간다. 당당하게 미식가 대열에 합류하고 싶다면 보리애국을 맛보길. 그동안 알던 맛의 범주를 확실히 넓혀줄 음식이다.

나주=김보경 기자 bright@nongm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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