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준칼럼] 혼돈 속 ‘아주 보통의 하루’를 기다리며

2024-12-30

불의 사고로 안타까운 179명 사망

일상을 일상으로 맞을 수는 없는가

국민이 정치까지 걱정하는 부조리

새해엔 모두에 ‘아보하’가 이어지길

은퇴한 고향 선배들과 얼마 전 모임이 있었다. 고위공직자, 대기업 임원, 군 장성, 언론사 사장 등을 지낸 분들이다. 한 선배가 “요즘 하루를 어떻게 보내는지 얘기해 보자”고 했다. 뜻밖이었다. 더 나이 든 ‘더 꼰대들’의 화려한 무용담이 이어져야 할 시간이었다. 몇 년 뒤 닥칠 일이라 궁금하면서도 비슷비슷한 하루가 아닐까 생각했다. 예상은 빗나갔다.

선배들은 대체로 식사하고 산책하거나 운동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만나는 사람은 이전보다 크게 줄었다. 그래도 아주 보통의 하루 일상은 조금씩 달랐다. 일에 치여 미뤄 둔 책을 마음껏 읽는다는 선배, 용돈벌이용으로 주식을 하는 선배가 있었다. 한 선배는 지자체에서 노인 일자리 사업으로 지원하는 꽃배달 일을 아내와 같이 한다고 했다. 인공지능(AI)을 모르면 남은 인생을 재미있게 살 수 없을 것 같아 AI 공부에 푹 빠졌다는 선배도 있었다.

30여년을 지켜만 본 가사노동을 통해 아내의 일상을 느꼈다는 얘기가 인상적이다. 그는 “난 설거지를 바로바로 하는데, 아내는 모아서 하는 성격이라 둘이 토닥토닥한다”면서도 “‘지금까지 이런 일을 반복했구나’라고 생각하니 가족을 위한 아내의 사랑과 희생이 새삼 느껴지더라”고 했다. 수년 전 아내가 허리디스크로 3개월간 누워있을 때가 떠올랐다. 집 안 구석구석을 닦고 치우고 빨래하고 식구들을 건사한 아내들의 일상이 지금 가족에게 아주 보통의 하루를 선사하고 있으니 감사할 일이다.

선배들은 한결같이 아주 보통의 하루, ‘아보하’의 소중함을 얘기했다. 큰 꿈 꾸지 않고 그저 그런 날이 지속되기를 바랄 뿐이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소확행’까지도 바라지 않는다. 확실한 행복까지는 아니더라도 큰 병, 큰 사고 없으면 그만이다. 무사안일(無事安逸)이라는 단어가 이렇게나 긍정적일 수 있을까.

제주항공기 무안공항 추락참사로 숨진 179명 모두는 어제 다시 보통의 하루가 이어지리라 믿었을 것이다. ‘새가 날개에 껴서/헐/착륙 못하는 중/언제부터 그랫는디/방금… 유언해야 하나’. 장난말이었을 마지막 문구가 진짜 유언이 되어 버린 그로테스크한 현실이 무섭다. 일상을 일상으로 맞이할 수조차 없다고 생각하니 끔찍하다. 연말을 맞아, 팔순 기념으로 자녀·손자녀와 함께 태국 여행을 가는 것쯤이야 버킷리스트에 올릴 특별함이 아니다. 그 정도야 소소한 일상이어야 하는 것 아닌가.

2024년 한 해 문을 닫는 대한민국은 아주 보통의 하루조차 걱정해야 하는 세상이다. 한밤중 뜬금없이 가슴 철렁이는 계엄 소식을 들을 줄 어느 누가 상상인들 했을까. 국민이 헌법 제77조 조항을 들여다보고 헌법재판소법 제23조(심판정족수)에서 규정한 숫자를 따져 봐야 하는 현실이다. 고향 선배들을 1주일 늦게 만났더라면 일상의 얘기를 나누는 시간조차 할애되지 않았을 터이다. 그 시간을 계엄과 탄핵, 정치를 둘러싼 거친 대화가 가득 채웠으리라.

정치가 국민을 위하는 게 아니라 국민이 정치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다. 정치적 이해관계와 득실계산에 온갖 비정상이 난무한다. 헌법재판소 재판관 9명 체제의 중대성을 왜 진즉에 인식하지 않았을까. 계엄조치가 잘못됐다면서도 대통령을 탄핵소추할 수 없다는 것도 정상적 사고가 아니다. 권세를 제멋대로 부리며 함부로 날뛰는 도량발호(跳梁跋扈)가 판치고 있다. 정치가 비정상이니 국민의 걱정과 한숨은 날로 커져만 간다.

장모님이 큰 병을 얻어 요새 이 병원, 저 병원을 찾아다녔다. 10개월째 이어진 의료대란의 실상을 체험하는 시간이었다. 의사와 진료 일정을 잡기조차 쉽지 않았다. 의사는 “2∼3개월 내 수술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최대한 앞당길 수 있는 수술 날짜가 2025년 7월 중순이라고 한다. 오죽했으면 어느 의사가 “계엄 포고령의 충격 속에서도 전공의들 48시간 내 복귀 문구에 눈이 가더라”고 자조했겠는가. 의사가 환자를 진료하고 수술할 수 없는 일상의 부조리다.

2025년 새해를 맞는다. 날카롭고 썩은 물질과 아프고 슬픈 마음을 하얗게 덮어줄 눈이라도 내렸으면 한다. 창문을 열고 새로운, 아주 보통의 하루를 다시 기대하게끔 말이다.

박희준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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