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빚진 또 한 사람

2024-10-02

“저의 증조할아버지는 일본 정부에 의해 한글 사용이 금지되었던 1940년대 한국에서 최초의 한국어 사전을 만든 죄로 체포되었습니다” 지난 2005년, 미국 링컨박물관 개관 기념에세이 콘테스트에서 17살 한국계 미국인 소녀 ‘미한 리’가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내가 아는 자유는 곧 언어의 자유’라는 주제의 글을 모두 읽은 그녀가 단상에서 내려오자, 조지w.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을 비롯한 참석자들은 갈채를 보냈다. 에세이에 자세히 언급되지 않았던 증조할아버지의 이름과 정체가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고향인 한국에서도 한동안 그의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한글학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그는 현재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잠들어 있다. 일제강점기, 우리말과 우리글을 지키기 위해국어교사 양성, 교재 간행, 국어강습회 개최 등 여러 가지 활동을 펼친 인물로 조선어학회에서 오늘날 국어사전의 모태가 되는 ‘큰사전’ 편찬을 주도하였다. 1986년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도 외래어에 밀려 사라져 가는 나라말을 걱정했다고 전해진다. 1962년, 정부는 국어국문의 수호와 발전에 이바지한 공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57년 한글날 총 6권의 큰사전 발간이 완료되었을 때, 한글학회 이사장 최현배는 사전 말미에 붙인 발문에 ‘거친 세파 속에서 이 편찬 사무에 관여한 사람들 가운데 천우의 건재로써 가장 오랫동안 중심적으로 각고면려(刻苦勉勵)하여 오늘의 성과를 이룬 이’라는 문구로 그의 헌신과 노고를 치하했다.

일제가 한국어 보급과 한국문의 출판을 일체 금지하는 상황 속에서 한글을 연구하고 사전을 만드는 일은 조선총독부의 정책에 정면으로 반하는 일이었다. 큰사전은 엄혹했던 일제강점기부터 6·25전쟁 이후에도 포기하지 않고 30년 가까운 긴 세월 편찬작업을 이어간 끝에 이룬 쾌거였다. 1947년‘큰사전’첫째 권을 편찬한 이후 둘째, 셋째 권을 잇달아 세상에 내어놓았다. 한글 연구자들과 한글 운동가들을 탄압하기 위해 조작된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붙잡혀 함흥지방재판소에서 내란죄를 적용받았고 1945년 광복 때까지 옥고를 치렀다. 이때 받았던 모진 고문으로 왼쪽 귀가 굳어버렸다. 1925년 연희전문학교 졸업 후 10여 년간 고등학교 영어교사로 근무하는 동안 영어보다 우리말을 가르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1897년 전북 장수에서 태어났다.

이쯤에서 그의 이름을 알아챈 사람도 있을 테고, 다른 인물을 떠올렸거나 혹은 누구인지 좀처럼 감을 잡지 못한 이들도 있을 것이다. 모국어를 마음껏 쓸 수 있는 나라를 꿈꿨던 미한 리의 증조할아버지, 그는 바로 건재 정인승 선생이다. 증손녀를 통해 머나먼 타국에서도 이름이 알려졌던 역사적 인물이 정작 고향에서조차 업적이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 같아 참으로 안타깝다. 청년과 학생 등 연령층이 낮아질수록 점점 더 그를 모르는 이들의 비중이 높아지는 듯하다. 장수군은 백용성 조사, 전해산 장군, 박춘실 장군, 문태서 장군과 함께 정인승 선생을 5의(義)로 받들고 매년 추모제를 지내고는 있지만 그것으로 후손들에게 우리 역사를 제대로 알려야 할 책무를 다 하고 있는 것일까?

10월 9일은 한글날이 제578돌을 맞는 날이다. 올해 10월은 장수군 계북면 양악리에 정인승 기념관이 세워진 지 20년째를 맞이하는 달이기도 하다. 장수군은 선양회 발족, 기념공원, 한글학당 건립 등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다. 우리말 우리글을 지키고자 고군분투했던 그의 일생과 업적을 더 널리 알리기 위해, 역사적 인물을 배출한 지역의 주민이라는 자긍심을 높이기 위해 중지를 모아야 할 것이다. 큰사전을 만들기 위해 피땀 흘렸던 조선어학회 회원들과 함께 우리가 기억해야 할 또 한 사람, 자랑스러운 정인승 박사를 잊지 말자. 한글을 자유롭게 쓰고 읽는 우리 모두는 그에게 빚을 지고 있다.

최한주 장수군의회 의장

※본 칼럼은 <전민일보>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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