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이 ‘전기톱 개혁’ 아르헨티나를 살렸다

2025-05-12

[특별 기획]

1. 아르헨 살린 '전기톱' 개혁

2. 100년 전 선진국의 몰락

3. 리버태리언 밀레이는 누구

4. 페로니즘의 향수는 아직도

5.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다

새 대통령을 뽑아야 하는 한국에게 아르헨티나는 훌륭한 거울이다. 누구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국민이 온통 깡통을 찰 수도, 그러다 다시 일어설 수도 있다는 걸 잘 보여준다.

포퓰리즘으로 거덜 나, 툭 하면 부도내고, 국제통화기금(IMF)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던 골칫덩이… 우리가 알던 아르헨티나는 더 이상 없다. 2023년 12월 취임한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의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ism) 개혁 이후로 말이다.

개혁의 핵심은 대대적인 긴축과 광범위한 규제 철폐다. 포퓰리스트 정부가 뭉텅뭉텅 나눠주던 보조금과 선심성 지출을 틀어막았다. 18개 정부 부처를 8개로 줄이고, 공무원 4만2000여명을 내보냈다. 취임 후 하루 2개꼴로 규제를 없앴다. 트럼프 정부가 공공지출 삭감, 규제 철폐, 행정 간소화를 위해 정부효율부(DOGE)를 둔 것도 밀레이의 개혁에 영향을 받았다.

그 결과 수십 년간 앓던 고질병들이 빠른 속도로 개선되고 있다. 2023년 말 월 25%였던 인플레는 2~3%대로 떨어졌다. 재정은 14년 만에 첫 흑자를 냈다. 성장률은 올해 5.5%를 무난히 달성할 전망이다. 또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라는 취급받던 페소는 유례없는 강세다. 해외 투자자들의 시각이 달라지면서 외화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A)는 ‘지금은 달러를 팔고 페소를 살 때’라고 했다.

포퓰리즘을 때려잡고 완전히 다른 나라로 나아가려는 아르헨티나의 현장을, 미주 한인 언론 최초로 취재했다.

포퓰리즘 대수술, 물가 잡고 성장률 높였다

아르헨 살린 밀레이 ‘전기톱 개혁’ ①

재정지출 30%, 공무원 4만명⭣

월 25.5% 인플레가 1% 눈앞

경제, 페로니즘 수렁서 회복세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플로리다 거리. LA로 치면 다운타운의 브로드웨이 거리와 비슷한 곳이다. 쇼핑몰, 기념품점, 레스토랑, 호텔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발을 들여놓는 순간 여기저기 큰 목소리로 “캄비오(환전)”를 외치는 사람들과 마주친다. 암달러상들이다.

하지만 이들과 흥정하는 관광객은 보기 어렵다. ‘블루 달러’라 불리는 암달러 환율과 공식 환율의 차이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2023년 말 25% 정도, 그 전엔 배에 달했던 게 말이다. 4월 말 이후엔 가끔 암달러가 더 싸지는 날도 있다. 지난 8일 은행의 공식 환율은 달러당 1138페소(소매 기준), 암달러 환율은 1170페소였다.

암달러상은 외환 통제를 먹고 산다. 외환 수급이 원활하고 시장이 안정되면 굳이 암달러상을 찾을 일이 없다. 플로리다 거리에서 빈손으로 돌아서는 ‘캄비오’들은 통제에서 개방으로, 불안에서 안정으로 향하는 아르헨티나 경제를 잘 보여준다.

아르헨티나에선 이를 ‘밀레이 효과’라고 부른다.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이 취임 이후 일관성 있게 추진한 자유지상주의 개혁의 산물이라는 뜻이다.

리버태리언 밀레이의 논리는 명확하다. 선심 정책 탓에 재정이 거덜 나고, 하이퍼 인플레가 일어났다. 따라서 이를 잡으려면 긴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퍼주기 복지, 방만 재정, 철밥통 공무원, 밑도 끝도 없는 보조금 … 뭐든지 전기톱으로 썰어내겠다고 공약했다. 과거 정부가 개혁 시늉을 할 때 쓰던 소품이 가위였던 데 비해 굉음을 내는 전기톱은 대중에게 그의 의지를 각인시켰다. 밀레이는 미국의 일론 머스크와 친해 올 초 정부효율부(DOGE)를 이끌던 그에게 전기톱을 선물했다.

그는 당장 보조금과 복지성 경비 등 공공지출을 대폭 삭감했다. 정부조직도 확 줄였다. 18개 부처 이름을 적은 테이프를 보드에 붙여놓고 “꺼져(¡Afuera!)”라고 소리치며 하나하나 잡아떼는 퍼포먼스는 유명하다. 취임 후 15개월간 전체 공무원의 8.4%인 4만2000여 명을 내보냈다. 이래저래 재정지출을 단번에 30% 줄였다. 중앙은행이 돈을 찍어 국채를 인수하던 것도 끊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개혁의 성과를 평가해 지난달 200억 달러를 지원한다고 발표했다.

1년여 만에 거시지표들이 모두 좋아지기 시작했다. 인플레는 잡히고, 성장률은 오르고, 통화가치는 높아지고, 빈곤율은 떨어지고, 재정은 흑자로 돌아섰다. 사람으로 치면 독한 몸만들기로 혈압, 당뇨, 콜레스테롤이 두루 개선된 셈이다.

최대 성과는 역시 물가 안정이다. 보통 물가가 1년에 두 자리 수로 뛰면 나라가 흔들리지만, 아르헨티나에선 한 달에 두 자리 수도 예사였다. 땔감 사는 것보다 지폐를 태우는 게 싸다고 할 정도의 하이퍼 인플레였다. 그러던 게 이젠 월 1%대가 가시권에 들어왔다. 1976년 이민 와 물류사업을 하며 역대 정권을 겪어본 LK글로벌 강태민 대표는 “인플레를 잡은 건 과거 아르헨티나를 되돌아보면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고 했다.

물론 인플레가 잡혔다고 물가수준이 낮은 건 아니다. 외국인이 느끼는 달러 환산 물가는 의외로 높다. 올초 영국 이코노미스트의 빅맥 지수에 따르면 아르헨티나가 미국보다 약 20% 높았다. 플로리다 거리 선물가게에선 젊은층에 인기인 스탠리 텀블러에 11만6500페소라는 가격표를 붙여놨다. 취재 시점(3월14일)의 환율로 약 97달러. 미국 판매가의 거의 세 배다. 근처 나이키 매장에선 ‘보메로(vomero) 17’ 모델을 31만4999페소(262달러)에 판매하고 있다. 미국보다 100달러를 더 줘야 한다. 시간당 2.3~3.2달러인 최저임금을 감안하면 엄청나게 높은 가격대다. 스페인에 근무했던 코트라의 남선우 부에노스아이레스 무역관장은 “이곳 물가가 3년 전 마드리드보다 비싸다”고 말한다. 또 주아르헨티나 한국대사관의 유정아 참사관도 “제네바 근무 시절의 체감물가와 비슷하다”고 한다.

성장률은 지난해 하반기 플러스로 돌아섰다. IMF는 2024년 성장률을 -2.8%로 예상했으나 가속이 붙어 -1.7%로 높아졌다. 올해 전망치는 5.5%로 급반등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헤럴드의 칼럼니스트 릴리아나 프랑코는 “IMF 전망에 대해 경제학자들 의견이 대체로 일치한다”며 “예상보다 더 높아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아르헨티나 최대 회계법인 리식키리트빈의 세자르 리트빈 대표는 “내년 이후에도 비슷하게 성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10년 넘게 제자리 걸음이던 경제가 성장하기 시작한다는 건 큰 변화다. 정부통계국(INDEC)에 따르면 2024년 민간부문 정규 근로자는 660만 명이다. 2013년에 비해 불과 20만 명 증가한 데 그쳤다. 아르헨티나의 고용탄성치가 0.6이므로 밀레이의 남은 임기 3년 간 같은 수준으로 죽 성장한다면 고용은 매년 3.3%씩 모두 10%쯤, 약 67만 명 증가하게 된다.

잠시 높아졌던 빈곤율은 뚝 떨어졌다. 초기 공공부문 실업자들이 쏟아지자 야당은 나라가 더 가난해졌다고 거품을 물었다. 소득이 기본 생활비를 감당하지 못하는 가구의 비중으로 측정하는 빈곤율은 지난해 중반 52.9%로 치솟았다. 그 뒤 물가 안정과 고용 회복으로 최근 38.1%로 낮아졌다. 자유지상주의 개혁이 빈곤을 양산한다는 비난은 힘을 잃었다.

물론 부에노스아이레스 거리에선 노숙자를 자주 볼 수 있다. 이들을 부각시킨 언론보도만 보면 마치 경제위기라도 온 듯하지만, 실제론 다르다. 그 숫자나 밀도에서 ‘노숙자 천국’ LA와는 비할 바가 못된다. 경제가 잘 돌아가고 있다는 걸 체감할 곳은 많다. 유명 레스토랑은 미국 수준의 가격임에도 예약하기 어렵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립극장 테아토르 콜론의 주말공연 티켓 역시 구하기 쉽지 않다.

본격적인 규제철폐로 일상생활은 빠르게 달라지고 있다. 대표적인 게 주거환경이다. 월세를 눌러놓고, 세입자 못 내보내게 하던 임대규제를 밀레이 정부가 싹 없앴다. 세입자 보호는커녕, 임대물건을 줄이고 임대료를 폭등시켜 원성이 자자한 규제였다. 가주의 세입자보호법(AB1482), LA시의 임대 안정화 조례도 그와 비슷하다. 1년도 채 안 돼 임대물건은 170% 늘고, 임대료는 40% 떨어졌다. 지난해 대선 때 카말라 해리스 민주당 후보가 비슷한 임대 규제를 공약하자, 월스트리트저널이 이를 비판하며 모범사례로 든 게 밀레이였다.

시장이 살아나자 기업들은 움직이기 수월해졌다. 엘리오 델레 금속산업협회 회장은 “거시경제가 정돈되면서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해졌고, 개방에 속도가 붙었다”고 말했다. 통관, 인증, 대금 지급 절차는 몰라보리 간소화됐다. 과거엔 수입 승인을 받으려면 중앙은행에 서류를 제출하고 하염없이 기다렸으나, 지금은 웬만하면 48시간 안에 허가가 난다. 남선우 무역관장은 “무역대금 지급규제가 많이 풀려 기업들이 크게 반긴다. 투자 문의도 몰라보게 늘었다”고 전했다. 자유지상주의는 포퓰리즘에 오염된 경제토양에 희망의 싹을 틔우고 있다.

□ 도움말 주신 분(무순)

기예르모 모레노 (원칙과가치 당대표)

마르틴 라팔리니 (산업연합회 회장)

세자르 리트빈 (회계법인 리식키 리트빈 대표)

에두아르도 헤커 (전 방코나시옹 행장)

마티아스 쿨파스 (전 산업부 장관)

릴리아나 프랑코 (부에노스아이레스헤럴드 칼럼니스트)

다리오 쿠신스키 (UNPAZ 총장)

실비나 카탈디 (UNPAZ 국제국장)

마리아노 토마시 (산안드레스대학 교수)

엘리오 델레 (금속산업협회 회장)

리안드로 모라 알폰신 (전 생산개발부 산업정책국장)

루시아노 볼리나가 (아우스트랄대학 아시아연구센터 소장)

알레한드로 젠타일 (테친그룹 디렉터)

바우티스타 부르디외 (킨토투자자문 애널리스트)

에르난 로메로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 출판사)

구스타보 에이리즈 (라플라타 시립 오케스트라 비올리스트)

마르티나 이바르 (케네디대학)

엘피나 로한나 (부에노스아이레스대학 학생)

알레한드로 김 (변호사)

조애나 메사 알페르트 (콘덕토라 칼럼니스트)

이용수 (주아르헨티나 한국대사)

유정아 (주아르헨티나 한국대사관 참사관)

남선우 (코트라 부에노스아이레스 무역관장)

배성용 (부에노스아이레스 무역관 부관장)

최도선 (피바디 회장)

정유석 (중남미한상연합회 대표)

강태민 (LK글로벌 대표)

케빈 강 (LK글로벌 이사)

양수민 (강남익스프레스 대표)

김광복 (전 포스코 아르헨티나 법인장)

김미숙 (부에노스아이레스 한국문화원장)

정세훈(신성교회 목사)

고훈 (신성교회 장로)

박진성 (사업가)

조연미 (사업가)

황진이 (변호사)

이 우리엘 (포스코)

캐롤라인 김 (부에노스아이레스 병원 의사)

김소희 (부에노스아이레스 의대생)

부에노스아이레스=남윤호·장열 기자, 사진=김상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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